-인간세
남백자기가 말하길,
"이것은 도대체 무슨 나무인가?
반드시 특별한 재목일 것이다!
그런데 가느다란 가지들을 올려다보니
너무 구부러져 들보나 서까래로 만들 수 없고,
거대한 뿌리를 내려다보니
속이 푸석푸석해서 관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 입사귀들을 혀로 핥으면
입안이 헐어 상처가 생기고,
그 냄새를 맡은 사람들은
삼일 동안이나 미쳐 날뛰게 할 것 같았다.
이 나무는 재목이 아닌 나무여서,
이렇게 거대한 나무로 자랐구나.
아! 그래서 신인도 재목이 아니었던 거구나!"
내편 7편 중 인간세 중 가장 원형적인 이야기.
고대 중국 왕조 중 상나라 : 하/은/주나라 중 두 번째 왕조인 은나라.
이 고목은 상나라 수도 근처의 나무.
예전엔 주된 건축 자재가 나무여서
도시 근처에 큰 나무가 못자람에도 특이하게 거대한 고목
(말 네 필이 끄는 수레 천대라도
매어놓으면 그늘로 다 가릴 정도로, 중국식 과장법)
어떻게 거대한 고목이 되었을까에 대한
강신주 선생님의 작가적 상상력 :
- 자라기 전에 해로운 느낌이 들면 베어질 것이므로
장차 쓸만하다고 위장
(나 조금만 더 자라면 궁궐 재목으로 쓸 수 있어)하여
자라는 동안엔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던 나무
- 굉장히 위험한 나무이면서 생각이 깊은 나무
- 자를려고 할 때면 쓸모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 나무.
쓸모가 없어도, 쓸모가 있어도 죽을 수 있으므로
쓸모가 없는게 좋겠단 착각은 하지 말 것.
거목은 일종의 반례(counter-example),
즉, 날개는 나는데 필요하다고 주장하면
장자는 "펭귄 보셨어요"라고 던지는 식.
장자의 철학 : '잘도 그렇겠다'. 재목이 되면 행복하다고?
쓸모 있는 재목이 되면 잘리고 쓸모 없는 거목은 오래 잘사는데?
장자가 싫어하는 것 : '모든 A는 B다'란 성급한 일반화 내지 획일화.
목재가 되려면 나무가 먼저 죽어야 한다.
즉, 조직 내지 시스템의 재목이 될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나무가 죽는다는 것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쓸모가 있으면 거대 기계의 볼트처럼
자유를 박탈당한채 부속품으로 전락.
쓸모 있으려고 많이들 노력하는데
그건 죽음(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못감)을 자초하는 일.
쏠모 있는게 좋다고? 과연 그럴까?
쓸모 있어봐야 내가 성곽이 되고
내가 전함이 되거나 기껏해서 창이나 화살이 된다면?
인재? 영재? 내 뜻대로 못살면 살아도 죽은 것,
그렇다고 인재가 안되면 굶어 죽음.
사회에서 박수쳐주는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옳은가?
누군가 나를 훌륭하다고 할수록
자기가 원하는 것보다 사회가 원하는대로 살아
고유의 자신은 죽게 됨.
인문학적, 인간 사랑의 관점에서 인재라는 표현은 부적합.
제1강 황천 이야기에서의 쓸모와 연결되는 이야기.
장자의 당부 : 잘자라라, 누구나 거대하게 될 수 있다.
죽은 것처럼 살지 마라.
어느 나무가 죽어서 경복궁 서까래가 되길 원할까?
자살율 세계 1위 한국 :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내가 아닌 국가, 자본, 사회, 체제가 결정하는
쓸모는 좋은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좋은 건 살아 있는 것.
백수의 삶이란 쓸모 없는 삶이 아닌,
과로사, 정리해고도, 명예퇴직도 없으며 매일이 휴일인 삶.
사회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기준으로!
남들이 뭐라하든,
돈이 안나와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는 일
그것이 진정 좋아하는 일.
핵심은 '쓸모'가 아닌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
나대로 살기 위해선 가능성이 엿보이는 나무로서
쓸모 있어야 할 때도, 없어야 할 때도 있다.
스펙을 위한 자기 계발? 사회 내지 체제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고 셀프 손질하며
심지어 상표를 붙이는 괴기스런 죽어가는 나무가 아닌가?
거목처럼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 길 참고 기다려라.
장자의 글을 읽을 땐, 섣부르게 결론내리지 말고 많이 상상하라.
무용, 유용 택일의 문제가 아니고 때론,
쓸모 있는 척해야 산다
(서울대 가서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음악에 빠진 사람처럼).
즉, 인간세에서 살 땐 때때로 이중생활이 필요, 유용과 무용을 오가는 삶.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지나치게 빨리할수록 물이 넘치듯 쌓여 번아웃.
조금만 그렇게 이중생활하다가 대붕처럼 떠나라.
일단, 거대하고 자라고 봐라.
좀 더 살다보면 지난 시절의 고민이
참 쓸데 없는 고민이었구나 느끼게 될 것.
한국 사회 내지 현대 사회가
풍요속에서 왜 이렇게 황폐해졌는지에 관한 답이 될 이야기다.
나 역시, 누구보다 까불고 놀기 좋아하는 본성을 억누르고
고등학교 시절엔 모든 친구를 다 끊고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하여 원하는 대학엔 갔다.
그런데, 그 결과는?
간판만 멀쩡한 회사에서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하는 월급쟁이에 불과하다.
그나마 조금 다행인 건, 대학교 3학년에
내가 고전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시간이 더 흘러 장자라는
스승이자 가상의 휴식같은 친구를 얻었단 것이다.
그리고, 평소엔 말 한 마디 안하는
극 'I'인 내가(생각해보면 어릴 땐 'E'였는데
사회가 나를 'I'로 만든 것 아닐까?)
마음 껏 내 생각을 글로 적는 것도
내가 무척 사랑하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장자의 가르침을 모를 때에도
난 본능적으로 아싸로서 계륵을 자처했다.
저 녀석 뭔가 있는 것 같긴해서 자르기엔 아깝고
그렇다고 조직장에겐 적극적으로 충성하진 않아
크게 키우기엔 그런 그 묘한 경계에 선 생활을 해왔는데
운이 좋아 아직까지 살아남은 것 같다.
그러나, 언젠간 결국 경계에서 밖으로 밀려날 것이고
그렇다 하더라도 걱정없을만큼 조금씩 자라나게 되었다.
거대한 거목으로 자라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거대한 거목은 많을 것이나
거대한 거목은 다수가 아닌 소수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입에 풀칠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어떠한 형태로든 쓸모 있음을 보이거나
쓸모가 있어야 한다.
다만, 그러는 가운데에도 자신이 사랑하는 것,
고유의 본성, 인간다움을 결코 잃어선 안된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렇게 원하던 대기업에 입사했음에도
직장내 괴롭힘을 당해 자신을 괴롭힌 그 사람을 죽이지도 못하고
자신을 죽이게 되는 원통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왜 자신을 괴롭힌 그 사람때문에 내가 죽어야하는 것인가?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그를 처단하는게 낫지.
장자의 다른 이야기엔
알을 못낳는 거위의 배가 갈리는 얘기가 나온다.
즉, 이 경우엔 쓸모 없으면 바로 죽는다.
쓸모 없어도 살 수 있으려면
강신주 선생님께서 얘기하셨듯
무용과 유용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하든가,
아니면 누구도 나를 건드릴 수 없는 경지에 이르거나
누구도 나를 건드릴 수 없는 좋은 환경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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