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강신주 장자수업 [29강. 현해이야기 : 삶과 죽음, 그리고 자연의 대서사시]

dirigent21 2024. 3. 10. 23:34

죽어가는 과정이란 누구나 겪을

중요하고 외로운 시간.

현해 : 매달린 데서 풀려난다.

건강했을 땐 삶과 죽음을 안다고 자처하고

생각이 일치했던 네 명의 친구.

-대종사

자사, 자여, 자려, 자래 이렇게 네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말했다.

"누가 없음을 머리로, 삶을 척추로,

그리고 죽음을 꽁무니로 생각할 수 있는가!

누가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이

한 몸이란 걸 아는가!

나는 이런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

네 사람은 서로 쳐다보고 미소를 지으며,

마음에 거슬리는 것 없어 서로 친구가 되었다.

자여가 병이 들자 자사가 병문안을 왔다.

자여 : "위대하구나! 저 사물의 만듦이

나를 이렇게 뒤틀리게 만드는구나!

구부러져 등이 튀어나오고

오장이 위로 향하며

턱이 배꼽에 숨고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아졌으며

목뼈가 하늘을 가리키니,

음양의 기운이 모두 뒤죽박죽이구나!

자여의 마음은 편안하여

아무런 일도 없는 듯했다.

자여는 비틀거리며 방 밖으로 나가

우물에 자신을 비춰보며 말하길,

"아! 저 사물의 만듦이

또 나를 계속 뒤틀리게 하려 하는구나!"

자사 : "자넨 그게 싫은가?"

자여 : "아니, 내가 무엇이 싫겠나!

내 왼팔을 차츰차츰 닭으로 변화시키면

그에 따라 새벽을 알리는 소릴 내겠네.

내 오른팔을 차츰차츰 석궁으로 변화시키면

그에 따라 구운 올빼미를 기다리겠네.

내 엉덩이를 차츰차츰 수레로

그리고 나의 신을 말로 변화시키면,

그에 따라 그것을 탈 것이니

마구를 채울 필요가 있겠는가!

또한 얻는 것도 때에 맞은 것이고,

잃은 것도 따라야 할 것이네.

때에 편안해하고 따름에 머물러야

슬픔과 즐거움이 개입할 수 없는 법이지.

이것이 옛사람들이 현해라고 했던 것이네.

그런데도 현해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물들이 더욱 얽어매게 될 거야.

게다가 사물은 자연을 이기지 못한 지 오래인데,

내가 또 무엇을 싫어하겠는가!

얼마 후 자래가 병에 걸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죽으려 할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둘러앉아 울고 있었다.

자려가 가서 안부를 물으며 말하길,

"쉿! 비켜요! 변화를 놀라게 하지 마세요!"

자려가 문에 기대어 말하길,

"위대하구나! 만물의 만듦이여!

또 그대를 무엇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그대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가?

그대를 쥐의 간으로 만들려 하는가?

그대를 벌레의 다리로 만들려 하는가?

자래 : "부모가 명을 내리면

동서남북 어디에 있든 자식은 따라야 해.

음양은 사람에게 단지 부모일 뿐만이 아니네.

그것이 나를 죽음에 가깝게 하는데,

내가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무례한 자가 될 뿐이니,

음양에 무슨 죄가 있겠나!

거대한 대지는 형체를 주어 나를 싣고,

삶을 주어 나를 일하게 하고,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하고,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네.

그래서 나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

바로 나의 죽음을 긍정하는 이유네.

위대한 대장장이가

쇠붙이를 녹이고 있는데

쇠붙이가 튀어 올라와

'나는 장차 반드시 명검 막야가 될거야'

라고 말한다면

대장장이는 틀림없이

상서롭지 못한 쇠붙이라고 생각할거네.

이제 한 번 인간의 형체를 빌렸으면서도

'사람일뿐이야, 사람으로 있을 거야!

'라고 말한다면,

저 변화의 만듦도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사람이라 생각하겠지.

지금 한 번 하늘과 땅을 거대한 용광로로 생각하고

변화의 만듦을 위대한 대장장이로 생각한다면,

어디로 간들 좋지 않겠는가!

편하게 잠들고 새롭게 깨어날 뿐이네.


장자의 소망 : 우리가 다섯 번째 친구가 되는 것.

머리(태어나기 전), 척추(살아가는 것),

엉덩이/다리(죽어가는 것).

친구의 자격 검증 : 병 들어가는 사례(1차),

죽어가는 사례(2차),

모두 통과하면 죽어서도 친구가 됨.

반복해서 읽다보면

종교가 붕괴하는 경험을 할 수도.

앙리 베르그송

(프랑스 관념론자로서 생철학, 직관주의 대표자),

세계에는 있는 것만 있다,

없는 것(관념)은 존재하지 않고 머릿속에만 있다.

'없다'는 관념에만 존재하는 아주 좁은 생각.

추억이 가득한 소중한 나무가 잘리면

기억이 오래 남듯

없어지는 것이 소중할수록 강해지는 관념.

50대가 거울을 볼 때

20~30대의 얼굴을 원하나 젊음은 잃어버린 것,

20대의 얼굴이 없다는 착각 속에

지금의 자기 얼굴을 놓치는 것.

봄이 지나고 가을이 왔는데도

봄을 생각하면 가을을 향유하지 못함.

20대도 있고, 30대도 있고 50대고 있는데

각기 거기서 가장 행복한 것일뿐.

없다는 것은 나에게만 있는 것.

자여의 망가지는 몸 : 노화의 과장된 표현.

현해란? 20대의 젊음에 거꾸로 매달린

50대를 풀어놓는 것,

사라지는 20대 시절을 부정하진 않으나

집착하지도 않는 것.

현실은 50대인데

20대에 매달려 있다면 끊어버려야!

병든 자여가 얻은 것 : 있음의 가치,

없음을 부정하지 않으나

없음에 지배되지도 않는 자여.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

20대의 나와 50대의 나가 다르듯

갓 태어났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도 다름.

건강했던 몸이 구부러지듯 우리의 정신도 변하는 것.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세상 속에

여러 마주침에 의해 탄생한 '나'.

내가 죽고 나면 나만 없는 것이고

내가 없었다고 해서 세상도 없던 것은 아니다.

내가 없어지는 것에 집중하니까

다른 게 안 보이는 것!

자신은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부부의 명검 : 간장(남편), 막야(아내).

쇠붙이의 세계에서는 최고인 막야.

영원히 살거란 생각은 무모한 생각.

쥐의 간, 벌레의 다리 :

죽고나면 쥐나 벌레가 먹는다는 뜻.

죽으면 벌레와 구더기에게 가고

화장하면 연기가 되어 물로 갈 것.

막야의 관점에선 있음과 없음이 있으나

용광로 관점에선 모두 있는 것.

동양 형이상학의 시초,

기철학(우주 만물의 실체를 기로 보고

기의 운동, 작용으로 우주를 설명).

기철학의 핵심 : 기가 모이면 형태를 갖춘 것이 되고

흩어지면 없어지는게 아니라

안보이는 기로 흩어질 뿐.

동아시아인들의 죽음에 대한 원래의 세계관 :

용광로의 쇳물(눈에 보이지 않는 기) vs.

막야(눈에 보이는 형체).

옛사람들에게 죽음은 휴식,

요즘 사람들에게 죽음은 공포.

억지로 죽음을 늦추려 애쓰는 현대인들.

성연매, 거연각 :

편하게 잠들고 새롭게 깨어날 뿐이네.

우리의 몸, 머리카락이

어느 짐승의 다리와 발이 되고

어느 식물의 거름이 됨.

우리의 정신과 생각이

내 후손으로 전해져 나가는 것일뿐이란 걸 깨달으면

용광로 전체로 확장되는 자아.

사람과 돼지, 사람과 사마귀,

사람과 쥐의 구별이 없는 장자.

돼지의 일부분이 내 근육과 머리카락이 되었듯

나도 마찬가지.

다시 태어난다면 바위로 태어날 수도,

나무로 태어날 수도 있지만

다시 친구가 될 것 같은 네 사람.

이 관점에서 나무와 공기는

누군가의 숨결이 스며들었을지 모를 우리의 친구. 


 

장자의 이야기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네 친구와 같이 집착하지 않고

삶과 죽음에 쿨한 친구가 생겼으면 하는 바램이다.

안타깝게도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인 내 아내는

관점이 사뭇 달라 이런 친구는 될 수 없다.

갖가지 종교가 생겨나고 각종 미용시술이 생겨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억지로 삶을 연장시키는 것은

삶과 죽음에 초연하지 못하거나

쿨하지 못해서 생겨난

비극적인 양상이라 볼 수 있다.

산자와 죽을 자 모두 지옥속에 고통받는 형국.

불교의 윤회론, 도교의 저승 세계 또한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를 악용해서 저 세상을 만들어내고

불교는 한 술 더 떠 윤회설까지 만들어 냈으니까.

내가 죽어서 썩어져가면 분해되어

어느 생명체의 세포의 일부가 될 것이란

원자론적 이야기로 끝났어야 하는데

온갖 상상의 찌꺼기와 미학의 찌꺼기로

혼탁하게 한 것일 뿐이다.

중,고등학교 시절까지의 나를 생각하면

한 반에 60명 정도 되었고

매 시간마다 선생들이 출석부를 불렀었는데

반이 바뀌어 1-2주 지날 무렵엔 1번부터 60번까지의

학급 친구들의 번호와 이름이 저절로 외워질 정도였고

중학교 시절엔 보통

영어 교과서를 읽으라고 선생들이 시켰는데

난 테이프 몇 번 들으면 저절로 외워질 정도가 되어

교과서를 읽지 않고

자랑스럽게 외워서 얘기할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어를 잘하냐?

그건 절대 아니다.

그냥 앵무새처럼 따라하기만

잘할 수준일 뿐이었으니까.

4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한 달 정도 좋아하는 피아노곡을 계속 치면

저절로 외워졌다.

그런데, 40대 후반 언제부턴가

몇 달, 1년 가까이 쳐도

외워지지 않는 때가 오고야 말았다.

그 대신, 복사기 같은 암기력의 자리를

인문학에 대한 이해와 감성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자 더 큰 마음의 행복이 찾아왔다.

4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북한산 숨은벽 능선 코스를 가도

그렇게 힘들단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40대 후반에 다시 가보니

그 때완 전혀 다른 느낌이었고

매우 힘들단 느낌이 들었다.

젊은 시절의 팔팔한 암기력과 체력은 가고야 말았으나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산을 가끔 갈 수 있고

또 다른 차원의 뇌가 열린 내가 좋아졌다.

아직도 집착이 강하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 줄어들고 있으므로

계속 줄어들 것이란 희망을 가질 수 있어 좋다.

이 세상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삶과 죽음에 쿨하지 못한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만물의 허접인 인간들이

이상한 방식으로 오래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대자연은 급속도로 망가져가

어쩌면 모두가 멸종에 다다를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