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대한 주제에 도가 삽입된 형태의 글.
장미 : 이쁘다 vs. 가시가 있다.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은유적 표현,
핵심은 문맥이므로 글자에 빠지지 말 것.
도행지이성 : 장자 철학의 핵심,
도는 걸어가야 이루어진다,
걸어가다 보면 뒤에 남겨진 것이 길.
우리에게 길은 애초에 없는 것.
-제물론
말은 숨을 쉬는 것만이 아니고,
말하는 자에게는 말이 있다.
그 말하려는 것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면,
실제 말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어떤 말도 있지 않은 것인가?
만약 이런 말이 새들의 지저귐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런 구별의 증거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도는 무엇에 가려져
진짜와 가짜가 있는 것인가?
말은 무엇에 가려져
옳고 그름이 있게 되는가?
도는 어디에 간들 있지 않겠는가?
말은 어디에 있든 허용되지 않겠는가?
도는 작은 이룸으로 가려지고
말은 화려한 꽃으로 가려진다.
허용된다 해서 허용되지 않고
허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도는 걸어서 이루어지고,
사물은 그렇게 불려서 그런 것이다.
어떻게 그런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이다.
어떻게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물에는 원래 그렇다고
여길 수 있는 측면이 있고,
사물에는 원래 허용된다고
여길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어떤 사물도 그렇지 않은 것은 없고,
어떤 사물도 허용되지 않은 것은 없다.
한국 고유의 표헌 :
길들이다(길을 들이다) == 내 몸에 맞춤,
내 것으로 만든다.
인간의 놀라운 특징 : 다른 동물을 길들임(가축화),
생존을 위해 동물 스스로 환경에 길든 것과는 다름.
길들이는 교육 vs. 길드는 교육.
길들이는 교육 :
엄마 없이 못 살도록 교육하면
엄마가 없을 때 붕괴하는 아이.
좋은 교육 : 어디서든 살아남고
길들 수 있게 가르치는 것.
과거와는 달리 정착 생활을 하게 된 인간.
쥐의 생존력 :
정착 생활하는 인간의 주거지에 나타나
인간 주변에 길든 쥐.
돼지와 달리 우리가 길들이지 않은 쥐,
돼지나 닭과 달리
도행지이성을 실천하는 쥐.
도행지이성 :
도가 우리를 끌어가며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서 길이 만들어지는 것,
정해진 길을 걷는 것은 무의미한 일
쥐처럼 스스로 길든 동물 :
쥐를 찾아 인간 주변으로 온 고양이,
인간과 고양이의 묘한 동맹.
돼지와 닭의 일생은 인간이 정한 것.
살신성인(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옳은 도리를 행함) :
장자가 비판했던 유학 사상, 돼지의 길.
집쥐가 도망가면 들쥐가 되는 것.
작은 이루어짐 : 쥐는 인간 거주지에서만 살아야 해!
작은 이루어짐에 가려져 이게 아니면
죽을 것 같겠지만 나가면 그만.
삶이 이루어지는 어느 곳에나
깃들 수 있는 쥐.
쥐는 집에서 살아야 해,
쥐는 야생에서 살아야 해
어느 것이나 미친 쥐.
쥐들 사이에선 벌어지지 않는
가짜 길과 진짜 길의 논쟁.
어디론가 길들어 들어왔듯
이유가 사라지면 떠날 수 있는 것.
쥐와 달리 자신의 길이
유일한 세계라고 생각하는 인간.
도행지이성의 '행' == 소요유의 '유'.
걸어가지 않으려는 사람들만이
주어진 길에 머물러 있음.
누군가의 마음에 길들었다가
그 사람이 떠나면 힘듦.
회사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죽지 말라,
괜찮으면 머물고 아니면 나오는 것.
쥐로부터 배울 점 : 소요유의 정신,
떠날 수 있는 힘,
어딜 가든 적응하는 담대함.
도행지이성의 감각 :
언어의 뜻이 먼저 있는 게 아니라
말에 길을 내는 것.
지부지 : 가리킴은 이르지 않음
(plum이 자두로 이어지진 않음).
지부절 : 이르면(일단, 가리키게 되면)
끊어지지 않음.
기표(기호 : '자두'),
기의(기호의 의미 : '자두'하면 떠오르는 것),
사물(실제로 존재하는 '자두').
새들의 지저귐 : 그들 나름의 기표.
뭘 가리키는지 아는 순간
단어와 사물은 연결되는 것.
장자의 메시지 :
네가 좋은 언어를 만들어서 불러라.
하나의 언어가 무엇을 가리킬 때
일단 연결만 되면 끊어지지 않음.
학문을 하든, 예술을 하든
높은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선
옛 사람들이 걸어온 길을
부단히 찾아보고 학습해야 한다.
오죽하면 일만시간의 법칙이란게 있어
하루 3시간씩 10년 정도 수련을 해야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전문가 중에서도
세상을 바꾸는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타고 난 재능이 있거나
남들이 따라간 길을
부지런히 따라가는 가운데
자신만의 길을 찾는 사람들로서
이런 부류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확률적으로 세상을 나은 방향으로 바꾸거나
세상에 보탬이 되는 전문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시간을 퍼부어가며
굳이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예체능을 예로 들면
그렇게 죽도록 노력해도
동네 피아노 학원 원장,
동네 무용 학원 원장,
동네 미술 학원 원장,
동네 태권도 학원 원장으로
끝나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 직업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가 되기 위한 길을 가더라도
그 길을 따라 성공하는 사람들과의 경쟁에 밀려
처음부터 그 길을 가지 않은 사람과 같거나
더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굳이 죽도록 노력하지 않아도
동네 피아노 학원 원장, 무용 학원 원장,
미술 학원 원장, 태권도 학원 원장은
남아도는 고급 인력을 잘 운용만해도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꿈이다.
소위 명문대를 나오고 박사학위까지 받음에도
기껏해야 삼성전자에 취직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물론 자랑스러워하는 경우가 있지만)
고등학교, 대학만 졸업해도
삼성전자를 잘만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전문가의 길은 어찌보면 허망한 길일 수 있다.
문제는 부단한 수련의 길을 직접 걸어가보기 전엔
자신이 성공적인 전문가가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게 것이다.
10년 노력해왔는데
1년만 더 노력하면 임계점을 넘어
천재 수준에 올라갈지,
아니면 10년 더 노력해도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이 될지는 모르니까.
따라서, 수많은 노력과 시간을 허송하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이 길이 맞는 건지,
아닌지를 하루 빨리 깨달아 아는 것이다.
말로는 세상을 이렇게 바꾸면 좋겠다 하지만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사람을
도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할 줄 아는게 뒤에서 정
권 내지 정치인 욕만 해대는 사람들.
그들 역시 수꼴들이 잡았던 그 권력을 잡으면
수꼴과 똑같거나
오히려 한 술 더뜰만한 자들을 보아왔다.
세상을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길은
어찌보면 굉장히 단순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길이다.
온갖 비난과 고통을 감내하며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냐
말 것이냐는 선택의 문제이다.
자신이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갈 자신이 없으면
닥치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을
존경의 눈길로 바라만 봐주거나
그들을 응원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자신들이 하면 뭔가 달라질 것처럼,
자신들은 그들보다
뭔가 더 순수하고 고결할 것처럼 떠들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마치, 자신들은 아름다운 소절하나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면서
그저 연주자들을 비평함으로써
밥벌이를 했던 비평가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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