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강신주 무문관 : 주인공으로 살기 [38강]

dirigent21 2024. 11. 9. 14:16

10칙 청세고빈(청세 스님이 외롭고 가난하다)

조산화상에게 어느 스님이 묻길,
"저 청세는 고독하고 가난합니다.
스님께서 제게 무언가를 베풀어 주십시오."
조산화상 : "세사리!"
청세스님 : "네"
조산화상 : "청원의 백씨 집에서 만든 술을
세 잔이나 이미 마셨으면서도
아직 입술도 적시지 않았다고 말할 셈인가!"


우리의 마음을 희론시키는 '언어의 길'
언어의 길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못 보게 함.
자신은 고독하고 가난하다고 말하는 청세스님,
고독 = 홀로 수행, 가난 = 소유욕이 없음.
고와 빈은 불교에서 나쁜 것이 아님.
세사리 = 아사리(아차리아, Acharya) : 불교의 지도자.
자신이 아사리임을 받아들은 청세스님.
세사리 = 청원의 백씨 집에서 만든 세 잔의 술.
부처는 내가 되며 수행은 혼자 고독하게 하는 것,
각자의 깨달음의 색깔은 모두 다르다.
수타니파타(Suttanipata) : 불경 가운데 가장 앞선
초기 경전을 대표, 부처의 말씀을 모은 것,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독).
고와 빈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내세운 청세스님.
조산화상의 아사리냐는 물음에 대답하며
자신을 인정한 청세스님은 

과연 깨달은 사람인가?
세사리라는 말을 듣고 부처가 되었는가?
내가 내 삶의 주인인 것을 

남에게 인정받을 필요 없음.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아직 나는 약하고 의존적.
부처는 삶의 손님이 아닌 주인.
고와 빈의 의미를 모르는 청세스님.
자이나교(Jainism) : 
아임사(불살생)의 서계를 준수하며
철저한 고행, 금욕주의적 인도 종교.
중론 제18 관법품 : 
내가 없는데 어찌 내 것이 있겠는가?
중론의 핵심 : 나와 나의 것.
나의 것이 많은 사람은 

나라는 자의식으로 가득,
자의식이 강할수록 소유욕이 강함.
비는 오는(실체) 것이 아닌 공함.
공함 == 인연의 화합.
비가 주어가 되면 

올 수도 안 올수도 있는 것처럼 표현.
무아(공) : 세월과 생활환경에 따라 '나'도 변함,
매 순간마다 새로운 '나'는 만들어짐.
눈사람이 녹는 것, 꽃이 지는 것 : 인연이 다한 것.
나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것이 핵심.
가난한 사람의 자의식은 상대적으로 약함.
나이가 들수록 행복한 것은
가질 것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아서.
오히려 집이 나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나'는 공하고 인연 화합으로 만들어진 결과물.
좋은 인연을 만다면 나도 좋은 영향을 받음.
내가 변해도 예전의 나를 기억하므로
변하는 것은 만만치 않음.
집착 : 조금씩 변하는 나를 연속선 상에서
같다고 보면 나는 변하지 못함.
'나'에 집착하므로 번뇌가 있는 것.
나의 젊음에 집착하면 

늙어가는 내 모습에 고민.
집착이 없으면 번뇌도 없다.
무아를 깨닫고 집착을 알면 사라지는 번뇌.
육바라밀 : Paramita, 파라(저쪽)미타(간다),
보살의 여섯 가지 수행 덕목인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반야바라밀.
보시 : 육바라밀, 십바라밀, 

사섭법의 제 1 덕목으로
자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
나의 것을 줄이면 나도 줄어듦.
나의 것이 줄어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편해진다.
내 것을 내려놓으면 외롭지 않고 부유해짐.
깨달음을 얻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아픔이
내 아픔으로 다가와 외롭지 않음.
나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다.
원효스님 : 열반에 이르면 열반에 머물 수 없다,
물은 바람이 불면 물결친다.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면
나의 평온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의 고통으로 물결친다.
고는 외롭게 수행하는 과정이고
그 끝은 자비로 열리게 된다.
'나의 것'을 줄여 '나'라는 것이 줄어들면
마음이 넓어짐.
'나의 것'이 많아질 때 늘어나는 행복,

vs.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때 
나누는 기쁨으로 늘어나는 행복,
어느 것이 진정한 행복인가.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의 마음을 가지는 것.
무소유의 무는 동사로 해석 : 내가 가진 것을 없앤다.
자비란 나의 것을 줄이는 무소유.
개인의 소유욕 관점에선 

가난하고 외로워 보이나
진정한 고와 빈이 되면 

결코 가난하고 외롭지 않은 길,
집도 절도 있는 세상이길.


그 유명한 예수의 팔복에 관한 산상수훈은
"마음(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로 시작한다.
내가 교회 다닐 때에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갈급하다는 의미로서
복음에 갈급하는 마음이
천국에 이르게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강의에서는 가난을 
소유욕이 없다고 해석하는데서 머리가 울렸다.
예수는 돈을 사랑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매우 어렵다고 했으므로
가난==소유욕이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즉,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갈급하는 마음과 소유욕이 없다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기막힌 표현인 것이다.
요즈음 내 마음이 편안해진 것에
소유욕이 낮아진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세상엔 흔히 가난한 자가
더 선하다는 그릇된 믿음이 있다.
그런데, 가난한데 집착이 강하고
남의 것을 갈망하고 질투한다면
그는 진정으로 가난한 자가 아니다.
소유욕이 없는 가운데

남이 가진 것을 탐하지 않고
평안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으로 가난한 자이고
그가 선하다고 할 수 있다.
자수성가형 부자들은
지독히 없는 가운데
부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과 혹독한 수련으로
가난을 탈출한 자들이므로
그들은 없는 자들이긴 했으나
결코 가난한 자는 아니었다.

예수는 비록 허황된 말을 했으나
(사실 이것도 12제자라는 자들과
바울에 의해 크게 왜곡되었을 수 있다)
나는 그가 분명히 실재했다고 믿고
사람취급 받지 못한 모든 자들을
자비심으로 품고 그들의 어버이가 되어
부처와 같이 집착을 벗어난
훌륭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내가 악하다고 보는 것은
분명한 악신인 여호와와 
성인 예수를 연결시켜 

부풀어진 교리의 누룩이다.

현대인들이 갈수록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은
내 것에 대한 집착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약화된 공동체 의식 가운데
넓고 풍족해진 나만의 세계에 대한 댓가로
외로움으로 몸서리 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자본주의적 세상은
이러한 흐름을 가속화시켰고
이러한 흐름은 곧 자국우선주의를 강화하는
악당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더 나아가 자연은 공생이 아닌
정복의 대상 내지 이익 추구의 대상으로 보는
현상이 더욱 강화되어
어리석인 인류는 자신의 무덤을
혁신적으로 빠르고 깊게 파내려 갈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1k4jUilHq5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