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의 3성
변계소집성 : 온갖 분별로 채색된 허구적 차별상,
의타기성 : 온갖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인식 작용,
원성실성 : 분별, 망상이 소멸된 상태에서 드러나는
그대로의 청정한 모습, 편견, 과거경험을 벗어난 상태.
교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선종.
내가 생각한 삶이 내 삶이 아닐수도.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 실제 모습은 다를 수도.
나의 모습은 말과 생각이 아닌 행동에서 찾아야.
사랑이란 의무가 아닌 자연스러움,
내 곁에 있을 때 행복하다는 느낌을 주는 행동.
자크 라캉(프랑스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언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 정립) :
"나는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말과 실재의 간극이 크다는 걸 깨닫는 것이 선불교.
언어의 길이 끊어지면 삶의 길이 열림.
말은 한순간이나 행동은 온몸으로 느껴짐.
내가 어떤 것을 진정 좋아하다면
그것을 가까이 하는 과정의 내 발걸음이 가벼움.
말이나 생각이 아닌 행동에서 진실을 찾아야.
34칙 지불시도
남전 화상이 말하길,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
앎은 도가 아니다."
남전 화상이 말한 대상 : 보통 사람이 아닌 수행자들.
직지인심 : 사람의 본래 마음, 선종에서 깨달음의 세계.
언어가 아니고 마음을 잡아야 한다고 했는데
뜽금없이 마음이 부처가 아니라는 남전 화상.
견지망월 : 달을 보라 손으로 가리키니 손가락만 봄,
본질을 외면하고 지엽적인 것에 집착,
손가락은 교종의 수많은 경전,
손가락만 보면 생기는 학파.
참선 :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기의 본래면목을
참구하는 불교수행법.
마음 자체만으로는 안됨 :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아도
외압이 작용하면 사라지는 가짜 깨달음.
특정 조건에서만 마음이 편하다? 부처가 아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참선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내 마음이 있어야.
내 마음을 다른 곳으로 가게하는 불편함이 없어야.
마음만으로 안되고 매 곳마다 네 마음이 있어야 부처.
알면 도가 아니다 == 아는만큼 행동할 수 있어야.
어느 곳에서나 내 마음은 내게 있어야 깨달은 자.
부처가 아니면 마음도 없고,
도가 아니면 앎도 없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야
내가 서 있는 곳이 가짜가 아닌 진짜가 됨.
노자, 장자는 공자의 유학을 잘 알았으므로
그들을 비판할 수 있었고
예수는 바리새와 사두개인 등의 가르침을
통달했으므로 그들을 비판할 수 있었으며
선불교의 대가들도 교종의 가르침을 통달했으므로
그들을 비판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기존의 것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만이 길이요 생명이라고 외치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무시하고 참람하며 위험한 자들이며
사기꾼이요 사이비 교주들인 것이다.
예수는 분명히 주여주여 하는 자들마다
천국에 이른다고 하지 않고
뜻 하나도 거스르지 않아야 간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의 뜻과는 달리
쉬운 복음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 믿음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기독교의 길은 굉장히 어려운 길로 다가왔고
그러한 면에서 기독교의 신은
허구일 가능성이 훨씬 높은 점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분명히 구원을 받는 자는
극소수라고 적혀 있는데
그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라는 신은
결코 만만치 않은 굉장히 까다로운 존재이므로
그의 기준에 맞아 칭찬받고 선택될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가르침은 일맥상통한다.
기독교에서의 구원은
불교에서의 열반과 비슷한데
진정한 열반에 이른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어쩌면 한 명도 없을 수도 있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이 세상을 바꾸는 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또한 존경할만한 진정한 리더 역시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리더는 처음엔 괜찮은듯하나
끝은 참람함으로 가득하게 된다.
성경속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을 보라.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으로 훌륭한 왕은
단 한 사람도 없고 모두 실패자였다.
역사 속의 수많은 지도자들을 보라.
과연 모든 면에서 선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잘한
지도자가 과연 몇이나 되는지.
다시 말하면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거나
진정한 지식 내지 지혜에 이르고
더 나아가 그것으로 세상을 바꾸는 자는
극소수라는 것은 명백한 진리라는 사실이다.
불완전한 인간이란 동물이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마찬가지로 부자 역시 극소수인데
그 부자 가운데에서도
선한 부자는 극소수이다.
가난한 자들 가운데에서도
진정으로 선한 가난한 자 역시 극소수이다.
따라서, 이 세상은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가득한
아수라의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모든 사람은
진정한 깨달음을 결코 얻지 못하거나
진정한 리더 내지 부자가 되는 길을
완전히 포기하는데서부터
편안함이 시작될지 모른다.
확률적으로 진정한 깨달음을 얻거나
진정한 부자가 되는 확률은 극히 낮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다른 길에서 편안함을 찾는 것이 훨씬 쉽다.
세상만사의 허무함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뭔가 대단한 것을 얻거나 해내겠단 욕망을
완전히 버릴 때부터 편안함이 급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결코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거나
진정한 부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이 길은 완전히 포기하고
그냥 언젠가 먼지가 되어 사라질
소시민으로서 편안히 사는 길을 택했고
결코 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TByEVtZsrZ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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