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에 집착해도 답이 없다,
건강해졌어도 약에 집착하는 격.
운동, 약 모두 적당한 게 좋은 것.
불교의 핵심은 멍한게 아닌 깨어있는 상태.
애정의 마음이 나오면 그것이 곧 부처.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은 자비로서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도 사랑하며
온갖 생명체까지 사랑할 수 있는
감수성을 만들 것이냐.
마음이 가는 것과 '식별'하는 것은 다르다.
눈치 빠른 개만도 못한 식별로 만족하는 가족.
언어는 우리를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게 함.
언어도단 : 언어의 길이 끊어짐,
정말 좋거나 안 좋은 일을 경험하면 말문이 막힘.
화두를 푸는 것은 언어도단.
말보다 포옹이 더 좋은 소통이 될 수도.
언어의 길이 끝난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과도 통함.
친밀한 사이가 되면 언어의 길은 어느 순간 끊김.
36칙 노봉달도
오조 법연 화상이 말하길,
"길에서 도에 이른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선 안된다.
자, 말해 보라!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문자와 언어를 중시하는 교종.
'불립문자'를 내세우는 선종,
남의 언어를 앵무새처럼 떠들면 안됨,
그러나 선종이 경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능숙하면서도 한 단계 더 뛰어넘은 것.
중론의 핵심 : 희론(prapanca) 적멸.
중론의 귀경계, '희론을 적멸시키는 부처에게 예배'.
희론 : 잘못되고 무의미한 말 등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이 우리를 희롱함,
언어로 인해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착각에 빠지는 것,
내가 아닌 이론이 주인으로서 나를 사로잡음.
여러 기상 조건이 맞아야 내리는 비,
비는 여러 인연의 결과물.
그러나, 언어로 표현하면
'비가 온다', '비가 안온다'.
'비가 안 온다' == 비가 있는데 내리지 않고 있다,
비가 주어가 되면 올 수도,
안 올수도 있는 것처럼 표현,
중론에선 비는 공하다.
비를 실체화하면 희론에 빠짐.
희론적 사고방식이 확장되면
없는 것인데도 신, 천국, 지옥과 같은 것을 만들어 냄.
번개가 친다는 것 역시 실체적 사고방식.
비가 안온다 대신 날씨가 맑다, 인연이 다했으므로.
사라져도 어딘 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아트만,
집착의 근원.
'맑은 세계'는 느끼지 못하고
'비가 안 온다'로 잘못 느낌.
비 오는 것을 본 사람들이
사라진 비에 집착하여 '비가 안 온다'라고 함.
'비가 안 온다'가 아닌 '날씨가 맑다'로 느껴야
언어의 길이 끊어지는 것.
하늘에서 내린 비는
인연의 마주침이 다해 흩어진 것.
눈사람이 녹았다고
천국에 갔다고 생각해선 안됨,
눈사람은 눈, 만드는 사람, 기온 등
여러 인연이 다시 결합하면
또 생길 수 있움.
언어는 비라는 단어를
날씨가 맑을 때도 기억하게 함.
언어에 사로 잡혀선 안됨.
침묵도 언어, 시를 보면 말하기와 침묵이
교차하면서 리듬이 생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오스트리아 빈 태생으로
현대 영미분석 철학 선구자, 일상언어학파의 창시자,
'나'라는 단어 == 문법적 착각.
안내리는 비를 기다리는 것은
천국을 기다리는 황당한 종교적 가르침과 동일.
늙었어도 '젊음이 사라졌다'고 하면서
나를 못보지 말고
타타타(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현재의 '나'를 직시하라.
모든 집착은 '언어적 문제'에서 온다.
선불교의 언어도단/불립문자, 나가르주나의 공,
모두 언어적 문제를 극복하자는 가르침.
강사들이 교주와 같이 열정적으로 이야기할 때
선동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무문스님이 내린 화두의 답 :
'턱을 잡고 주먹으로 입을 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와 일맥상통,
조주스님 스타일이라면 쓰다듬어 주는 것.
부처를 만나서 경배하면 나는 부처가 아닌 불제자.
깨달은 사람은 언어의 길에서 자유로움.
깨달은 사람이 원하는 것은
나도 깨달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노자, 장자를 접할 때 흔히들 오해하는게
그분들은 유교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유교적 가르침 가운데
나쁜 면을 부각시켜 경계하면서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오르길 추구한 것인지
모든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을 추구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길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선종도
교종보다 한 차원 높은 경지이겠으나
불행하게도 한 차원 낮은 경지로 가는 길에서조차
허덕이는 대부분의 중생이
더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자신이 만든 가상 세계에 빠져 있는
대부분의 망상가들은 무식이 자랑인것마냥
자신은 모든 것을 통달하여
구름 위에 떠 있단 자기 착각 속에 빠져 사는 것이다.
더 불행한 것은 한 차원 낮은 유교 내지 교종적
가르침 속에서 핵심을 잡지 못하고
사이비 종교인마냥
엉뚱한 것을 추구하여 우월의식에 빠져
세상을 망치는 지식인들이 양산된다는 점이다.
초일류 기업의 임원의 수준을 보라.
더 높으신 양반들의 외압 내지
본인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부상을 질병과 구분 못하고
갑론을박을 벌이겠다니.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부끄러운줄 모르고 저능아인척 하는
저런 부류의 리더가 우글거리는 가운데
천문학적인 적자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으며
성과급을 반납하긴 커녕 오히려
단 한푼이라도 더 챙기는 가운데
실력 있는 엔지니어는 탈출하면서 침몰중인
초일류 기업의 한심한 현실이 아니겠는가.
주가는 초일류 기업의 한심한 현실을
냉정하게 반영하고 있는 중이고.
https://www.youtube.com/watch?v=qUnkaujO-Us
조선조에 예송논쟁 등에 빠진 한심한
사이비 유교학자 내지 양반들 때문에
이 땅이 오랑캐에 짓밝히고
왜구에 노략질을 당하지 않았는가.
안타까운 것은 박멸되지 않은
친일 잔재 세력이 토작왜구화 되어
언젠가 다시 침략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2025.3.30]
뻔뻔한 토착왜구 세력은
내란죄를 엄한 세력에 덮어씌우고 있다.
참으로 저들의 뻔뻔함은
무한한 것 같다.
광복을 꿈꾸던 김구 선생이
이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아마도, 폭탄을 터뜨려 멸절시키고
싶지 않았을까?
일본보다 더 나쁜 것들이므로
https://www.youtube.com/watch?v=jamyQkPh2GE
말꼬리 잡으며 논쟁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다.
나도 젋어서는 참 많이도
한심한 짓 많이 했고
아직도 가끔은 그 버릇이 나오기도 한다.
이것 역시 언어에 대한 집착으로
벌어지는 것이므로
누군가 이상한 말을 하면
거기에 열받아 길길이 날뛰지 말고
그냥 어느 미친개가 짖어대니
상종하지않고 피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빨갱이 등
이상한 말을 들으면
그들과 논쟁하지말고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내가 그들을 아무리 알아듣기 쉽고
이성적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늑대가 교화되지 않듯
결코 돌이킬 사람들이 아니고
나만 피곤하거나 공격받기 때문이다.
미친 개는 죽일 수 없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화가 많은 나의 성격상
내가 만약 절대권력자 내지 신이라면
토착왜구 내지 미친 개들은
한 놈도 남김없이 깨끗이 박멸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속의 여호와란 존재는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했으면
그냥 싸그리 박멸시켜 버리지
왜 노아의 후손을 남겨놔서
두고두고 후회하며 분노에 사로잡혀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다가
끝내 자기 아들을
희생 제물 삼기까지 해야했나.
그리고, 물로 심판했으니
언젠가는 불로 심판하고
그것도 모자라 단지 믿지 않는단 이유만으로
영원무궁토록 고통받게 하겠다고까지 한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변태적인 가상의 존재인가?
자기를 닮은 피조물로부터
영원무궁토록 찬양 받겠단
그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심한 존재가 성경속의 삼위일체 신인 것이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는 것이니
집착에 의한 폐해가 너무도 큰 세상이다.
화가 많고 잔인하며 결벽증에 사로잡힌
자신을 닮은 존재로부터
진정한 찬양을 받겠다는
그 생각이 자기 모순 아니겠는가?
절대 악의 씨로부터 어찌 절대 선이 나오겠는가?
종교인으로서의 한계가 있지만
황창연 신부님은 그나마 의식이 깨어 있고
말씀을 재미있게 하셔서 종종 즐겨 보는데
사막 종교의 창시 세력들이 벌이는
지긋지긋한 대학살의 퍼레이드는
참으로 자기 모순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46RXpK1i4O0
아내와 하루 종일 집에 있지 않지만
집에 있을 때면 떨어져 있을 때보다
붙어 있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우리는 포옹을 잘한다.
아내를 안고 있으면 예쁜 강아지와
고양이를 안고 있을 때와 같이
더 이상 좋을 수 없다고 느낄만한
행복에 젖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해맑은 성격이어서
심각한 것, 깊이 생각하는 것을 극혐한다.
즉, 이런 류의 강의에 초집중하는 나와 달리
심각한 건 채 1분도 들을 수 없는 성격이다.
처음엔 이런 아내를 참 한심하고 딱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런 심각한 것을 몰라도
해맑고 건전하게 사는 내 아내가
어쩌면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 아내에 이런 류의 주제로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없는 것은 다소 아쉽다.
반려견과 이런 생각을 나눌 수 없어도
인간에게서 얻을 수 있는 초월적 행복은
누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이 아내와 심각한 얘기를 안해도
행복한 것에 만족하련다.
https://www.youtube.com/watch?v=fMLKtUYXw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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