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 : naive, 봄바람, 자비, 현정
임제, 백장 : sharp, 겨울바람, 치열, 파사.
파사현정(사악함을 물리치고 옳음을 드러냄)
시는 '나'니까 쓸 수 있는 글.
무문관 30칙 조주감파(조주가 노인 간봄)
어느 스님이 노파에게 묻길,
"오대산으로 가는 길은 어딘가요?"
노파 : "똑바로 가세요."
스님이 세 발짝인지, 다섯 발짝인지 걸어갔을 때,
노파 : "훌륭한 스님이 또 이렇게 가는구나!"
후에 그 스님이 이 일을 조주에게 말하자 조주는
"그래,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
그 노파의 경지를 간파하마"라 했다.
다음 날 바로 노파가 있는 곳으로 가서
조주는 그 스님이 물었던 대로 묻자
노파도 똑같이 대답했다.
조주는 돌아와 여러 스님들에게 말하길,
"너희들을 위해 오대산의 노파를 완전히 간파했다."
'또'의 불길함 : 깨닫겠다고 사찰에 들어가
깨닫지 못하고 조주의 사찰 근처에서 일이나 함.
발터벤야민, "삶, 수행 모두 일방통행이다".
삶의 힘든 점 : 많은 갈림길, 이 길이 아닌가벼.
노파심 : 쓸데없는 걱정, 잔소리, 애틋함, 측은지심,
일장춘몽같은 부질 없는 인생에서 현재만 보임,
꽃이 폈을 때 예뻐야 하고 꽃이 폈을 때 지지 말아야.
아이를 위한 가치가 아닌 탐욕, 자본주의적 가치.
체제가 원하는 것을 해줘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
중론, "내가 없는데 어찌 내 것이 있겠는가?"
아이를 잘 낳아 기를 수 있을 땐
잘못된 생각으로 잘 못 키우는 미숙한 부모,
생각은 성숙했음에도 몸이 허락하지 않아 못키움.
노파심은 성숙한 마음이자 사랑.
두 번째 노파심 : 조주의 노파심,
재야의 고수로 착각한 제자를
조주가 손수 나서서 단순한 노파라고 안심시킴,
젊은 스님에 대한 노파심.
어쩌면 노파와 조주는 서로의 정체를
이미 알았으나 모른체 했을수도.
나는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측은지심의 노파가 아닌
심술궂고 악독한 노파를 상상했다.
즉, 똑바로 가면 천길 낭떠러지가 있거나
사나운 짐승이 있어 낭패를 보게 되니
악독한 노인이 그릇된 길을 알려줘서
'이제 가면 언제 오나'식의 말을 내뱉는걸로.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기본값이
아직도 이처럼 삐딱하고 부정적인지
다시 한번 간파하게 되었다.
나이 50을 먹었지만 지금도
나같이 게으르고
자기 생각이 아싸적으로 뚜렷한 사람은
결코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고
아이와 원수가 될거란 생각에
내 사전에 아이는 없다란 생각이 드니
아직도 임제나 백장적 사고 방식이
나를 지배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선 결고 없음에도
완벽하고 정의로우며 선한 신이 나타나
내란수괴는 물론, 토착왜구 내지
세상의 모든 병신같고 사악한 세력들을
한 놈도 빠짐 없이
아마겟돈으로 모아 불싸질러
요한계시록에 묘사된대로
완벽한 정의가 실현되길
바라는 생각이 조금은 남아 있으니까.
예전엔 이런 신이 기독교의
성부,성자,성령인줄 철썩같이 믿었으나
지금은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신은
결코 존경할만하거나
선하다 생각하지 않고
어떤 종교에의 신도
선할 것이란 생각이 전혀 없다.
즉, 절대선과 절대악은
관념의 세계에만 존재할뿐
실세계에 있을 것이란 믿음은
가장 어리석은 것이란 걸 깨달아
요한계시록류의 판타지물에 대한 믿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젊은 시절에 비하면
많이 조주스러워졌으니
언젠가 시간이 더 지나면
상황이 역전될 수 있으리라 본다.
신혼때부터 아내는 나에 대해
일종의 노파심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나보다 학년으로 2학년 위인
누나이기 때문에 누나의 눈으로
보기에 평생 철이 안들 것 같아 보였나보다.
물론, 외모로는 내 눈으로 보기엔
연상의 아내가 나보다 훨씬 앳되어 보여
속을 모르고 겉만 본다면 소녀감성이 충만하고
한없이 해맑아 보여 철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수십년을 살아보니
내가 훨씬 더 철이 없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반대로 나는 아내에 대한 애정은 있었지만
상당 기간 노파심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어디 나가는 아내에게
나도 모르게 조심해란 말을 한다.
해맑지만 차분하여 덤벙되지 않고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있어
거의 사고를 치지 않는 아내인데도 말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조주스러워지는
나도 일종의 노파심을 느끼기 시작한 모양이다.
젊은 시절 패기가 넘칠 때엔
아내가 없어도 나홀로
모든 세상의 파고에 맞서
끄떡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으나
지금은 아내가 없으면
상당히 외롭고 슬플 것 같다.
아내가 특별히 요리를 잘하거나
현모양처와 같이 나를 챙겨주는 것은 없고
오히려 내가 밥상을 차려주기 때문에
아내가 없어도 먹고 사는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내 아내가
대체불가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내와 함께 있을 때
너무나 행복하고 편안하여
천국에서의 삶이 이런게 아닐까 상상하게 되고
어느 누구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을거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체로 게으르고
지극히 개인주의적이어서
남에 대해 무심한 나같은 사람이
기꺼이 밥상을 차려줄 수 있는 상대가
유일하게 아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를 구속하는 일은
전혀 없고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쓸데 없이 걱정하지도 않는다.
각자의 죽고 사는 문제는
남이 참견할 성격이 아니므로
그저 이렇게 행복하고 편안한 인연이
가능한 오래 지속되길 바랄 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87BuAJzox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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