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강신주 무문관 : 주인공으로 살기 [29강]

dirigent21 2024. 8. 31. 14:07

대통지승(크게 통하고 지혜가 탁월) : 과거불, 
미륵 : 미래불.
싯다르타는 카필라 왕국의 왕자,
후대는 스스로 깨달은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히여
'어떤 역사적 무게를 심어줄까'란 권위의 문제 착안.
용비어천가, '육룡이 나르샤' : 이씨 왕조의 권위,
전설은 만들어지는 것.
사성제 : 고(고통)집(집착)멸(소멸)도(방법).
과거, 미래에 집착하면 현재 우리 삶의 주인공을 놓침.
기독교에선 악인이라도 신의 뜻에 따라 천국에 갈 수 있음,
내 노력만큼 정당한 보상받는다면 신이 필요 없음.
불교에선 업보 이론,
고타마 싯다르타가 부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대통지승에서부터의 굉장한 역사 속에서의 수행 때문,
16번째 왕자가 석가모니불의 전생
대통지승으로부터 미륵까지의 강력한 권위,
내가 부처가 될 수 있을까?


무문관 9칙 대통지승
홍양의 청양 화상에게 어느 스님이 묻기를,
"대통지승불은 10겁 동안이나 도량에서 좌선했지만
불법이 드러나지 않았고 불도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청양 : "매우 합당한 질문이다."
스님 : "이미 그렇게나 오래 도량에서 좌선했는데
왜 불도를 이룰 수 없었습니까?"
청양 : "그는 부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묘법연화경(법화경, Lotus Sutra), 
'화성유품' 이야기 중 일부.
10겁이나 수행했음에도 부처가 되지 못하자
나머지 10겁 동안 추가로 참선하는
싯다르타 주변에서 응원하여 마침내 부처가 됨,
그러자 16왕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버리고
귀의하겠다고 찾아옴,
싯다르타 자신보다 주변에서 응원한 사람이 더 대단.
화성 : 신기루와 같이 최종적인 깨달음의 단계로 
착각할만한 중간 단계 임시 거처(방편).
사람, 삶의 핵심은 자발적으로 해야 가치 있는 것.
화엄경에서 가장 유명한 '입법계품'.
법화경, 화엄경은 용비어천가와 같이 종교적 성격이 강함.
선불교의 제자 하나가 교종이듯
법화경에 문제를 제기한 것 자체가 문제.
부처가 되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는게 결론.
철학자 입장에서 각자가 부처가 될 수 있단
인문학적 정신은 좋으나
이론적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면서
부처될 수 없다는 종교적 불교는 싫음.
돈오 : 어느날 갑자기 깨달음.
불립문자적 선불교는 위계를 깨뜨리자는 혁명. 
위계(권위의 계급) : 부처->경전->스님->나.
불립문자 관점에선 싯다르타는 경전 없이 깨우침,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듯
위계적 전통에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감히 이야기 못함.
내가 주인이 된다는 것은 
"이건 좋다, 나쁘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직지인심 : 경전이 아닌 마음을 가리켜 성불.
정상에 이미 오른 사람은 
더 이상 정상에 오르지 않듯
이미 부처가 된 사람은 부처가 될 수 없다.
단 번에 진정한 사랑에 빠지듯
10겁이나 지나 부처가 될 일이 아니다.
부처가 되려고 하면 부처가 될 수 없고
단 번에 부처가 되는 것.


예수, 싯다르타 등
소위 종교의 창시자가 정말로 있었다면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거룩을 가장한 대사기꾼들이다.
그들은 수많은 누락과 찌꺼기를 
제거하려고 했으니 실패했고 아이러니하게
후대에 더 많고 강력한 
누룩과 찌꺼기를 양산했으니
대사기꾼이자 처참한 실패자들이다.
이러한 대사기꾼이자 처참한 실패자들이
이 세상에 가장 악한 영향력과
가장 선한 영향력을 동시에 끼쳤단 측면에서
아이러니이자 불가사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이후의 수많은 머리 좋은 사람들이
학문이란 이름하에 수많은 지식의 쓰레기를 더한다.
그러니, 마치 플라스틱 쓰레기가 모이고 모여
쓰레기섬을 이루는 것처럼 
구제불능이 되고 말았다.


혹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예수나 석가가 단순히 종교적 사기꾼이었다면
어떻게 그렇게나 많은 수많은
현자들이 그들을 추앙할 수 있었겠냐고.
이것이야말로 종교적 기적이 아니냐고.
이에 대해선 아주 간단히 답할 수 있다.
소위 사토시라는 사람이 
비트코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렇게나 과학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서조차 아직 사토시가 누군지 모른다.
어떤 이는 사토시란 인물이 아니고
어떤 단체라고 이야기 한다.
마찬가지로 세익스피어는

실존 인물이 아니란 음모론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실체 없는 비트코인에 열광하며
수많은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감동받고 칭송한다.  
즉, 꼭 진리가 아니라도 수많은 아둔한 인간들은
어떻게든 낚일 수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궤변에 낚인 수많은 독일인,
아직도 김정은을 위대한 아버지로 모시는 북한인,

부동산은 앞으로도 계속 우상향할 것이란

굳건한 믿음을 갖고 부동산 투자를

열공하며 임장을 이어가는 수많은 남한인,

수많은 유행을 좇아 갖가지 한심한 모습으로
챌린지를 이어가는 자들을 보면 모르겠는가?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현명한 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아 왔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다만, 지혜로워 보이는 특출난 주성분이 있다면
그러한 주성분이 아둔한 부성분을 가릴 뿐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은 한심한 존재이다.


지식의 쓰레기가 우리의 정신을 파괴한다면
편의, 가식, 권위를 위해 양산된
수많은 물질적 쓰레기는
자연을 실질적으로  파괴한다.
거대한 양대산맥을 이루는 
정신적, 물질적 쓰레기는 
인간 스스로를 포함한
대자연을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히고 있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소위 세련된 인간이란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보면 
가식, 오만, 미련함이 가득한 
한심한 존재인 것이다.
TV에서 정글밥을 우연히 보았는데
바누아투의 해맑은 아이들의 미소를 보니
인간은 뭘 하려고 하지말고 그냥 저렇게만 
살았어야 하는데란 생각이 들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VK7ru-8lvM

 

물론, 박복한 운을 타고나
타들어가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비참하게 굶어 죽을 것이겠지만.
자연파괴의 반작용으로 얻은
수많은 편의, 패션, 쾌락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냥 대자연의 풍요, 무심함,
우연의 법칙, 먹이 사슬에 따라
수많은 생명체가 죽고 태어나듯
죽을 사람은 그냥 자연스레 죽고
살 사람은 운이 따를때까지 자연스레 사는게
자연의 법칙이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대자연의 법칙에 비추어 볼 때
자연을 파괴하고 
자신 내지 나머지 생명체를 괴롭게 하면서까지
억지로 인간을 살리는게
과연 진정한 자비이며 옳은 것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릇된 의무감의 노예이자
집착이 아니겠는가.
물론, 최선을 다해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살리는 것이
기본 윤리이자 상식이므로
이런 말은 궤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지나치게 오래 살아남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선을 넘지 말았어야 하나
이미 그 선을 세게 넘었다.
그러하기에 소위 똑똑한 자들이
최단시간에 스스로의 무덤을 가장 잘 파는 법을
고안하여 열심히 무덤을 파는 어리석은 존재인 것이다.
무덤을 빠르고 잘 파는 것도 모자랐는지
또 한편에선 어떻게 하면 최단시간에 
무덤을 가장 잘 덮을 방법도 고안하고 있으니
얼마나 미련한 것인가?
병주고 약주고, 병주고 약주고.
무덤을 파는 자들과 덮는 자들
과연 누가 이길지는 모른다.
현재로서 내가 보기엔 무덤을 파는 세력이 
압승할 것 같아 보인다.
부디 내 생각이 틀렸음을 바랄 뿐이다.
혹시 아는가.
공룡을 멸종시켰던 거대한 행성이
다시 지구를 향해 돌진하여
지구를 반토막으로 만들 정도로 
기가막히게 충돌해줘서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가운데
이 모든 삽질을 단숨에 멈추어줄련지.
이것이야말로 가장 공정한 심판이라 할 수 있겠다.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가며 
많은 것을 쌓은 자들은
애써 이룬 것을 영원무궁토록 누리지도 못하고
삽시간에 모든 것을 잃는 슬픔을 겪을 것이고
많이 쌓지 못하거나
성자와 같이 욕심과 집착을 버려
어떤 것이든 태연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조금만 슬프거나 거의 슬프지 않을 것이니.
이러한 측면에서 대자연의 법칙이야말로
가장 공정한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재앙, 
새하늘과 새땅을 묘사한 요한계시록은
어쩌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스스로의 희망사항을 기가막히게 표현한
판타지 소설일 수 있겠다.

기가막힌건 요한계시록을 보면
짐승의 표, 사람의 숫자란 666이 나온다.
이 666은 수많은 컨텐츠의 소재이자
바코드, 이후 적그리스도 왕국에서
사람들 탄압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등
수많은 썰의 소재가 되어 왔다.
나 역시 지금보다 아둔한 시절
이 666을 철썩같이 믿었던 적이 있었고
깊이 탐구해 본 적 있었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로 인한 멸종이
지금까지의 멸종 역사상 6번째라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EY3T7FpNmd8

 

인간에 의해 6번째 멸종이 야기된다는 면에서
요한계시록은 기가막힌 판타지물임엔 틀림 없다.
비록 이 영상에 출연한 이정모님께선
낙관론적 입장에서 극복할 것이라고 얘기하며
희망고문을 하지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까지의 멸종 역사상
가장 처참하고 요란한 멸종의 역사가 그려질 것이다.
앞의 5가지 멸종은 아무도 대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겠단 도전을 하지 않았으나
한심한 인간들은 상상하지도 못할 뻘짓과
오직 나만은 살아남겠단 욕심에 사로잡혀
기상천외한 짓들을 벌일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바램이 있다면
이런 역겨운 뻘짓들이 벌어지지 않도록
혹여 지구가 더 이상 인간들이 살아가기
어렵게 되고 서로가 죽고 죽이는
생지옥이 펼쳐질 즈음에
거대한 소행성이 기가막히게
지구를 아작내줘서
모든 악인을 공평하게 심판해 주는 것이다.
물론, 더 바라는 것은 대자연의 자비심에 힘입어
지금처럼 편안히 살다 죽는 것이겠으나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희박해보인다.


아울러 한국은 죽어서도 경쟁해야 한다는 

내용인데 아무튼 여러모로 빡센 나라이다.
남은 인생은 좀 편하게 살고 싶은데
지금과 같은 편안함이
과연 얼마나 더 지속될지 모르겠다.

시체 처리 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져야

여러 사람들이 고생하지 않을 것 같다.

시체 처리하는데까지 경쟁하고

줄서서 대기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https://www.youtube.com/watch?v=CuQVsUlUcos

 

 

https://www.youtube.com/watch?v=25jceV-yr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