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강신주 무문관 : 주인공으로 살기 [27강]

dirigent21 2024. 8. 25. 16:04

무문관 4칙 호자무수
흑암 화상이 말하길,
"서쪽에서 온 달마(호자, 서쪽에서 온 오랑캐)는 
왜 수염이 없는가?"


춘추시대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
학이편,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 
어떤 상황, 무슨 질문에 대한 답일까?
전후 맥락이 있는 편부터 읽어야 이해가 쉬움.
논어를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
무슨 주제로 대화하고 있는지부터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
동양에서 수염이 없는 것은 환관이나 미숙함을 의미.
옛날에 수염은 성숙과 가부장을 상징.
달마의 상징과도 같은 수염.
량 : Pramana, 진리와 인식의 기준
인도에서 주장한 진리를 인식하는 4가지 방법 : 
현량(지각) : 감각기관에 의한 직접 경험적 지식.
비량(추리) : 이성에 의한 추리적, 
논리적 지식을 진리로 여김,
경험한 현량을 통해 추론.
비유량(동일시, 식별) : 견주어 비유함을 통해 아는 지식,
Identification.
성언량(경전, 성인의 말) : 
다르마키르티(Dharmakirti, 6-7세기경 인도 불교 사상가),
한역 명칭으로 법칭(법을 칭송).
판비량론 : 원효대사가 인명 비량의 형식을 통해
유식의 교설을 판론하여 671년에 저술.
불교인식론 : 인도 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불교 인식 논리학을 집대성한 
다르마키르티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
대승기신론 : 1-2세기경 인도의 마명이 저술했다고 하는
대승불교의 교리를 찬술한 대표 논서.
불교인식론에선 현량과 비량만 진리의 기준으로 인정,
비유랑, 성언량은 비량에 포함.
현량, 비량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는 것.
우파니샤드(Upanisad) : 
산스크리트어로 '사제 간 가까이 앉음',
문헌 대부분이 사제간 철학적 토론으로 구성)
베다(Vedas) : 
고대 인도의 종교 지식과 제례 규정을 담은 문헌,
브라만교의 성전을 총칭.
동아시아에서 선불교과 발달한 것,
5~6세기부터 12세기까지 
인도에서 불교인식론이 발달하면서
비유량, 성언량이 진리 기준이 아니라는 전통은 유사.
성언량쪽으로 갈수록 초월적 존재에 빠짐.
불교는 현량과 비량에서 출발,
내게 경전은 참고 수단일뿐,
현량과 비량에 가까워지는 것이 불교의 핵심.
현량, 비량 : 내 자신이 기준.
비유량, 성언량 : 신뢰할 수 있는 타인이 기준.
고대 인도에서 불교와 반대되는
브라만교(주문 외우는 전통)는 성언량이 더 강함.
참된 불교라면 비유량, 성언량을 쓰되 
타인의 현량과 비량을 부정해선 안됨.
서쪽에서 온 달마를 보지도 못했으면서
수맥퇴치를 위해 함부로 수염난 달마를 그리는 세태.
비유량과 성언량에 빠져 있는 것 아닌가?
불교경전을 통해 나를 잘 돌아봐야 잘 읽은 것.
나로 하여금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 좋은 불경.
꽃은 무상하기 때문에 예쁜 것.
아난에게 꽃은 예쁘니,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니라고 질문만 던진 싯타르타.
아난은 예쁘다면서 괴롭다고 했음에도
싯타르타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음.
우린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어
'모든'이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말아야.
강요가 아닌 경험을 해야
현량과 비량을 넓힐 수 있음.


얼마전 개봉작 가운데
핸섬가이즈란 영화가 있다.
별 기대를 안하고 봤는데
무척 코믹하고 재미있었다.
핸섬하지 않은 두 사나이에 대해
각종 고정관념으로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는
전개가 흥미진진하다.
사람은 감정적인 동물이다보니
확률적 접근보단 단정적 접근을 한다.
예를 들어 뚱뚱한 사람은
욕심이 많을 확률이 높다는 것과
뚱뚱한 사람은 모두
욕심쟁이라는 것은 다른 명제임에도
나를 비롯하여 후자적 접근에 빠지기 쉽다.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고
지혜도 넘쳐나는 것 같으나
이른바 핫플이란 이름하에
소문이 퍼지면 인증을 찍겠다고
난리들을 피운다.
상위 1%로의 맛을 즐기겠다고
상위 10%에 비해
가성비가 떨어지는 음식을
비싼 값, 엄청난 시간을 들여서라도
어렵게 찾아가 줄서서 먹으려 하지만
돈은 없다고 징징대는 세태.
특정한 곳으로의 쏠림 현상이
가속화되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타인의 판단 기준에 
자신을 맡기는 기이한 사회적 현상이라 하겠다.


얼마 전 당근마켓에
아들이 안 가지고 간 농구공을 
무료나눔하겠단 글이 올라와
잽싸게 1등으로 신청을 눌렀다.
그런데, 나눔물건에 대해 
채팅을 비활성화해놓아
대화를 할 수 없었고 신청을 했음에도
하루가 지나도록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올려논 다른 물건 가운데
채팅이 활성화된 것을 어렵사리 찾아서
농구공 나눔 의사를 물어보았다.
오전에 물어보았지만
밤 9시가 넘어서야 농구공을 

문앞에 내놓겠단 답장이 왔다.
정확한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물건을 내놓겠다고만 하고
정확한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정확한 주소를 몇 번을 물어보는 
내 메시지를 읽었음에도
이른바 읽씹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른바 나눔 갑질로서
나를 가지고 장난하는 것인가?
그 아파트 단지 전부를 뒤져서 
땀의 가치를 스스로 깨달아
공을 찾아가라는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신경질적인 원초적 나라면
독설을 날렸을 것이다.
"떠난 아들 대신 농구공을 양아들 삼아 
천년만년 소중히 기르십시오."
그러나, 장자, 선불교의 가르침을
배운 사람으로서 독설을 날려
그 사람 마음을 긁는다면
그 동안 배운 보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복수심에 불타는 성격상 분하긴 하지만
불교적 가르침을 따라
물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똥밟았다 생각하며 그냥 포기하잔 생각이 들었고
"메시지를 읽으셨는데도 답장이 없으시네요"
라고 남기고 더 이상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하루 종일 그 메시지를 읽지 않다
밤이 되어서야 읽었다.
그럼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생각했다.
"생각해낸 기똥찬 독설을 날려, 말어."
그 사람이 싸가지 없는 말을 하거나
약올리는 말을 했다면
독설을 날리는 유혹에 빠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말씨는 
반응 속도만 엄청나게 느릴 뿐 공손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그래 이제 그만 포기하자"
그런데, 아침 9시 즈음에 그분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주소는 XXX입니다."
하루를 꼬박 기다리던 주소가 드디어 도착했다.
그 주소를 받고 이 분이 또 다시 장난치는 것인가
의심이 들긴 했다.
그럼에도 가까운 거리니 속는 셈치고 가기로 했다.
갔더니 상태가 매우 좋은 농구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어르신으로 추정)은 농구공말고도 
내게 귀중한 가르침도 나눠주셨다.
나와 다른 상황에 사는 남을
내 기준으로 함부로 재단하면서
스스로 화를 돋구지 말라고.
아직도 미성숙하고 한참 먼 내 자신을 
현실 세계에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분과의 대화를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그 분은 어르신임에도 무슨 일을 하시는지 모르겠으나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까지 일하시는 분이셨다.
따라서, 내 메시지에 빨리빨리
응답하실 수 없는 분이었다.
그리고, 밤 10시를 넘거나
아침 일찍 답장을 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는 분으로 보였다.
따라서, 답답할 정도로 늦은
답장을 보내셨던 것이다.

혹은, 남에게 주소를 알려주는만큼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닌지 시험했을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이
감히 농구공 하나로 나를 가지고 논다고
함부로 생각하며 스스로 화를 돋운 것이다.
그 분은 단지 그 분 기준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한대로 행동했음에도
내 기준으로 생각하니 
쓸데 없는 번민에 나 스스로 빠졌던 것이다.

만약, 나 스스로 기똥차게 생각해냈다고 착각한

독설을 날렸다면 나는 농구공을 얻지 못했음은 물론,

그 분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고

나아가 나눔의 선한 행동도 그만 두었을지 모른다.

이처럼 말 하나, 행동 하나를 할 때

시원한 감정에만 치우쳐 함부로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hM78c6V4W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