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주인공인 사람 : 화두, 선문답이 역설로 들리지 않음,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주인이 아닌 사람 : 허무맹랑한 소리.
서양 사람들이 불교 이해 시작한 건 200년도 안됨,
칸트, 후설, 비트겐슈타인 등의 영향으로 시작된 불교 이해.
불교는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사고체계,
수많은 서양의 영향에 의해 우리는 서양인화되어 있음,
탐욕적, 개인주의적 사고,
더 멀게 느껴지는 동양의 사유,
따라서 서양철학을 통한 수월한 이해.
"집도 절도 없다" : 예전엔 집, 절에 가면 무조건 재워줌.
나의 쾌감, 고통만이 가장 중요시되는 자본주의적 자아.
서로 간에 애정이 없을 때 손해보지 않기 위해 따지는
정의, 공정, 평등.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면 보다 힘든 것을 감내.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인간의 이기심을 전제로 시작.
왜 육바라밀의 처음이 '보시'일까?
사람들에게 자비와 베풂이 자연스럽지 않으므로.
사랑하는 자녀아 공정하게 음식을 반반 나누는가?
사랑하게 되면 내 옷을 벗어줘야 하므로 남을 사랑하는건 힘듦.
탐욕(자비의 반대), 성냄, 어리석음.
개인주의가 고질화, 고착화된 현대.
동양 문화가 서구사회의 병폐를 보완해주길 기대한 서양인들.
반면, 서양 문화의 가장 나쁜 것을 모조리 배워버린 동양 사회.
서양 철학의 잦은 인용 != 서양 철학자들의 위대함.
굉장히 크고 넓은 불교의 사유.
예전 우리나라에 불교가 영향력 있었던 이유 : 당나라.
한국에 기독교가 영향력이 있는 이유 : 미국.
정치질서의 패권이 뒤바뀌어도 기독교는 영향력 있을까?
반면, 불교는 송나라로 패권이 바뀌어도 남아 있었음.
고대인도, 당나라 등이 사라진 현재에도 존재하는 불교.
12세기 이후 인도에선 힘을 읽은 불교가 티벳으로 전파.
열악한 조건에도 불교가 살아있다는 것은
불교의 정치, 경제학적 힘은 아님.
자기가 부처가 되려는 종교는 없음.
절대자에 의한 심판이 근간이 되는 기독교.
부처 ==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
선불교에서 직접적인 가르침을 피하기 위한 화두.
칸트, 후설, 비트겐슈타인같은 사람들이 4세기~12세기까지
활동한 인도 불교.
4~12세기 인도 불교는 완벽한 독해가 안됨.
불교를 제대로 알면 타인에 대한 아낌이 나와야.
깨달음의 궁극은 주인(사랑하는 사람).
자유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
깨달음으로 오는 자유 :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게 되는 것.
자유는 개인주의적인게 아님,
사랑의 대상이 생기고 가게 되는 것.
14칙 남전참묘
남전 화상은 동당과 서당의 수행승들이
고양이를 두고 다투고 있으므로
그 고양이를 잡아들고 말했다.
"그대들이여, 무엇인가 한마디 말을 할 수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 줄 테지만 말할 수 없다면 베어 버리겠다."
수행승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전은 마침내 그 고양이를 베어 버렸다.
그날 밤 조주가 외출하고 돌아왔다.
남전은 낮에 있던 일을 조주에게 이야기했다.
바로 조주는 신발을 벗어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남전은 말했다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반려 동물을 목줄을 걸고 끄는 것 : 내 것,
목죽을 풀어줬을 때 나갔다 다시 돌아온다면 반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의 기준으로 하는 생각일뿐.
자유가 있음에도 곁에 머물러야 진정한 반려.
잡아함경 :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탐하지 말라".
남의 아이스크림이 녹으면 속상한가?
고통은 나의 것이란 의식에서 옴.
동당과 서당 스님들의 생각, '내 고양이'.
목줄을 채우지 않았지만 내가 사랑을 주는 존재로 인식.
스님들이 '나의 것'을 탐하는 모습에 화가 난 남전스님.
무아 : '내'가 없으면 '나의 것'도 있을 수 없다.
무아를 받아들이면 나의 소유라는 인식 붕괴.
같은 모습, 지루한 산중 생활에 나타난 고양이란 속세의 존재.
고양이를 챙기며 색다른 재미를 느꼈을 스님들.
독립할 수 없는 아이를 주인공 취급하며 시중처럼 챙기는 부모.
스스로 주인이 되어 생기는
고양이를 돌보고 사랑할 수 있는 자격.
그렇지 않다면 고양이가 나의 주인.
자본주의에선 돈이 주인.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는 억압된 사회.
주인으로서의 말을 해봐라.
구지 스님 화두에서의 잘린 동자승 손가락, 죽임당한 고양이.
트렌드 때문에 키우지만 자신의 주말이 보장되어야 하는 견주,
스트레스를 받는 개를 위해 생긴 개 산책 아르바이트.
고양이를 죽인 건 남전스님? 동당 서당의 스님?
비교적 대중적이기에 등장 빈도가 높은 조주스님 에피소드.
무문관 : 책 제목에서부터 화두,
문이 없으니 통과하지 못하는 것? 그냥 지나가면 되는 것을.
상식 : 신발은 발에 신는 것.
조주스님에겐 모자이기도 한 신발.
추운 겨울 난방을 위해 목불을 태운 혜림사 스님.
추운 겨울 가지고 있는 것은 지폐뿐일 때
돈으로 보이는 사람은 얼어 죽을 것.
내가 졸릴 때 자면 그 때가 저녁.
졸릴 때 못자면 노예.
조주는 이거 내 고양이라고 한마디 했을 것.
나만의 해석으로 다시 풀어볼 것.
남전은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
이 화두를 접하니 경제적 자유란 말이 생각난다.
경제적 자유는 과연 진정한 자유일까?
자신은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자산을 체크하면서
뭔가를 더 가지려고 한다면
과연 그게 경제적 자유인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경제적 자유에 올라가면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고
직장 상사의 눈치를 안봐도 되는 자유는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자기가 갖고 있는 자산의 관리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즉, 자산은 고용주이고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은 돈을 위해 일하는 사람인 것.
돈의 돈을 버는 시스템, 파이프라인에
종속되어 있는 돈의 하인.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버핏이 그 날 시장 상황이 좋지 않으면
저가의 맥도날드 버거,
좋으면 좋은 맥도날드 버거를 먹었다는데
그게 과연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일까?
간혹 전재산을 기부한 천문학적인 부자나
주윤발 같은 미담이 나온다.
적어도 이들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자유인이 아닐까?
물론, 남을 도와야 한다는 강박에서
전재산을 환원한 것이라면 자유가 아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남에게 흘려보냄으로써
무아의 경지에 다다른다면 그게 바로 부처가 아니겠는가?
성불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므로
성불할 확률은 100만분의 1보다 훨씬 낮을 수 있다.
재테크 컨텐츠에 나와 자신의 컨텐츠를 파는 사람은
수백억, 수천억의 자산을 쌓고 있어도
결코 자유인이 아니다.
대통령을 한 번 해먹고 천문학적 자산을 가졌어도
또 한 번 해먹겠다고 나온 트럼프같은 작자가
과연 자유인일까?
천문학적인 부를 쌓아도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으로
사치와 향락을 탐닉하는 부자들이 과연 자유인일까?
나 역시 자유인이란 착각 속에 살고 있으며
어쩌면 죽을 때까지 진정한 자유인은
될 수 없을 확률이 훨씬 높아 보인다.
대체로 죽는 그 순간에야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 있는 가련한 인간들.
더 불쌍한 인간들은 죽는 그 순간에도
미련을 못버릴 수도 있고.
보살이 되어야겠다고 해서 억지스런 보살이 될려는 것
역시 집착이니 보살이 될 인격을 타고나지 못하거나
자신은 보살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되면
그냥 자기가 제일 편하다고 판단되는
제한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처선책일 것이다.
이 화두에 대한 나의 모범 답안은
조용히 한 마디 하고 그 절을 떠나는 것.
고양이에 잠깐 정신을 팔았다고
고양이를 죽이겠다고 하는
그 과격한 스님은 더 이상 존경할 수 없어
"니맘대로 하세요" 한 마디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을 것 같다.
조용히 한마디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고양이에 대한 집착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기에.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저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죽일 필요까지 있냐,
그냥 멀리 보내라고 했을 테지만.
https://www.youtube.com/watch?v=CmDLMp3d9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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