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강신주 무문관 : 주인공으로 살기 [5강]

dirigent21 2024. 4. 27. 15:20

불립문자 : 말로 내 지적인 면을 과시하지 않음,
언어도 단 : 언어의 길이 끊어져야 한다,
뒤돌아보면 쓸데없는 문제로 싸운것이 대부분,
말을 안하면 중간은 간다,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 : 언어의 길이 끝난 순간.
친해지면 대화를 안해도 되게 됨,
더 친근해지고, 좋아지는 언어가 끊긴 길,
말을 많이 쓰는 것은 잘 모를 때,
언어의 길이 끊기는 순간 더 놀라운 세계들이 연결.
화두, 공안을 들으면 막혀버리는 말문,
느낌을 알면 더 재미있게 받아들여질 화두,
마음이 맑아지면 이해가 됨.

무문관 44칙, 파초주장

파초 화상이 대중들에게 말하길,
"너희에게 주장자가 있다면
 너희에게 주장자를 주겠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주장자 : 큰스님들이 들고 있는 대나무 지팡이,
깨달음(내 삶의 주인공이 됨)을 상징.
좋은 교육 : 스스로 판단, 선택, 결정하는 
주인공의 삶을 살게 하는 것.
나쁜 교육 : 윗 사람의 말에 복종하는
애완동물을 만드는 교육.
한국 교육은 망가진 교육.
성불하세요 == 주인공이 되세요.

주장자를 줬는데 받는다 == 주장자가 없음.
주장자를 빼앗기면 주장자가 있었던 것.

있다고 해도, 없다고 해도, 침묵해도 맞을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대답하면 4대 맞음,
대상에 집착하면 대답의 가짓수가 적음,
그러나, "오늘 날씨가 좋다"라 든지 딴 말을 하면
안 맞음(있다고도 없다고도 침묵하지 않았으므로),
질문을 듣는 순간 
대상에 갇혀 대답을 생각하는 우리들.
대상에서 벗어나면 생겨나는
수천수만 가지의 답,
엉뚱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반박의 여지가 없는 탄탄한 논리가 필요한 재판.
주어에 집착하는 우리들.
타자의 마음을 읽으려하는 우린
타자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음.

주장자가 있는 자 : 
주장자(깨달음)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가지고 있다고 과시하는 사람,
주장자를 받으면 가지고 있는 척했으나
그렇지 못함이 증명됨.
다채로운 관점에서의 해석이 필요한 선문답.

없음 == 있음 + 1,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경우 없다고 생각.
책이 있던 의자를 본 사람은
의자를 가리킬 때 '책이 없다'(책에 갇힌 사람),
반면, 책을 못 본 사람은 '의자'.
없음은 우리의 기억에만 있음.
아뢰야식(alaya-vijnana) : 기억을 끊어야 한다,
노화된 얼굴을 보며 만족하는 사람과
젊음이 없어진 얼굴을 보며 놀라는 사람,
젊음에 대한 집착으로 하는 성형수술,
이로 인해 현재의 아름다움을 잃게 됨.

없애고자 하는 집착이나

가지고자 하는 집착이나 매한가지.
젊음을 찬양하고 늙음을 배척하는 사회.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집착으로 망가지는 삶.
젊지 못해 부끄러워 밖에 못나가는 자신.
주장자가 없다고 절망하는 사람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주인이 될 수 없어"
내게 주장자가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 
진짜 깨우침을 얻은 걸까?

불교에선 모든 존재는 부처가 될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 :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브라만,
절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수드라.
고대 인도의 근간인 카스트를 부정했기에
이단 취급을 받은 불교.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 아팠을 파초 스님.
[첨언] 빼앗음으로써 그들이 사실은 
깨달을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다는 것을 각성.


이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천국의 비유로서 
성경에서의 달란트 이야기가 생각나 적어본다.
-마태복음 25:14-30 각색
(천국은)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다.
각 재능대로
종1에겐 금 5달란트,
중2에겐 금 2달란트,
종3에겐 금 1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돌아오니
종1은 그것으로 장사하여 5+5,
종2는 2+2,
종3은 감추어두었다 1을 가져왔다.
주인은 100% 수익을 낸 종1, 종2를 칭찬하였으나
종3은 주인은 심지 않은데서 거둘만큼 엄한 사람이라
잃을까 두려워 그대로 가져왔다고 하자
이자라도 가져오지 않았다고 책망하면서
종3이 가져온 금 1달란트를 종1에게 주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3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부익부,빈익빈의 논리와 딱 맞아 떨어진다.
즉, 규모의 경제로 높은 수익률 낼 수 있는 자들에게
없는 자들의 돈을 빼앗아
있는 자들에게 몰아주자는 논리로서.

그러나, 선문답식 논리로 다시 생각해보면
종1, 종2는 자신에게 장사 수완(깨달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장사를 하여 수익을 얻었다.
그러나, 사실은 종1, 종2는 단지 운이 좋았을뿐
(진정한 깨달음이 아닌 가짜 깨달음)
다음 번엔 모든 걸 탕진할 수도 있다.
종3은 자신에게 장사 수완이 없다고 생각하여
주인에게 혼날까 두려워
있는 걸 고이 간직하다 주인에게 가져왔다.
그런데, 사실은 종3은 숨겨진 장사 수완을 
미쳐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었고
어떤 측면에선 훨씬 신중한 사람이어서
장사 수완을 배우거나 깨닫게 되면
다음 번엔 종1, 종2를 능가할 수 있다.

이 구절을 통해 
기독교가 얘기하는 믿음에 따른 천국은 
철저한 성과주의 관점에서
종3은 천국으로부터 영원히 팽당하지만
불교는 종3을 내치지 않고
주인공이 될 것을 격려하는 입장이란걸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과 천국의 영광이 
사실은 얼마나 성과주의적이고
조건적이며 편협한지 알 수 있다.

젊은 시절엔 상식을 통해 접한
노장 사상과 불교는
피지배층을 양순하게 하기 위한
지배층의 간접적인 통치 수완으로 보았다.
즉, 노장 사상과 불교는
사람들의 집착과 욕심을 없애는 특성이 있어
딱 지배하기 좋은 백성들로 훈육하기에 
훌륭하다고 보았다.
유교가 인의예지를 들어 윤리도덕을 통해
피지배층에게 충성을 강요함으로써
직접적인 통치 수완으로 작용한 것처럼.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 다시 보니
노자의 도덕경은 자연의 도를 얘기하는 가운데 
천하질서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어마무시한 리더를 위한 지침의 내용을 포함하고
장자는 각자 마음에 대붕 하나씩은 품어
이깟 천하질서에 복종하지말고 
할수만 있다면 초월하는 큰 존재가 되라는
가르침을 준 것이었다.
물론, 젊은 시절 내가 생각한
피지배층 길들이기로서의 기능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

소위, 나를 포함한 길들여진 똑똑한 바보들은
이 세상의 온갖 지식과 선입견에 사로 잡혀
그 틀을 벗어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지식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남의 생각에 사로잡혀
대체로 자신만의 판을 짜지 못하고
남들의 판만 키우는
성실한 노예가 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은
언제나 똑똑한 바보 위에 있어 왔다.
그래서, 똑똑한 바보들이 보기엔
보면 욕만 나오거나 무식해보이는 
저들을 결코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똑똑한 바보들의
빌런 배불리기 무한 경쟁이 이어질수록
이 세상은 테크노피아가 되기보다
살아가기 팍팍한 디스토피아가 될 것으로 보인다.

힘이 없는 자들이 빌런 세력을 
무너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빌런 세력의 여집합 모두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즉, 여집합 원소 각자 모두 깨달아
죽음을 각오하고 끊임없이
빌런 세력에 저항하거나 아예 떠나버리면
성공하면 빌런 축출
실패하더라도 여집합은 사라졌기에
남은 빌런끼리의 싸움으로 서로를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그 여집합 원소 각자의 사정에 따른
자신만의 우상으로 인해 사분오열되기에
날이 갈수록 빌런세력은 승승장구하는 것이다.

지금 떠들고 있는 것을 
먼 훗날 다시 돌아보면 
참 많은 헛소리를 지껄였구나
웃을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그러하더라도 현재의 내 생각을 
재미삼아 적어나가는 것일 뿐.

 

https://www.youtube.com/watch?v=fszMhpGgXP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