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립문자 : 문자를 내세우지 않는다.
타인에게 나의 앎을 알리는 방법 : '말'.
제일 말이 많은 학부생들.
석사, 박사 과정을 거치며 점점 들어드는 말수.
교수가 되면 더 말이 줄어들다 늙으면
철학을 전공했는지 모를 정도로 되어야.
문자를 통한 검증과 학위.
불립문자 == 현대사회에서의 불립스펙,
나의 배움의 정도나 출신을 내세우지 않음,
나를 '나'로 봐라!
언어에서 자유로워지는게 제일 중요,
침묵도 말이 될 수 있다.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양해지는 문자.
시적인 언어로 활용된 선문답.
선종은 교종(서양 철학보다 복잡한 문자의 세계)을
비판하며 나온 것.
선종, 스스로 부처가 되는데
문자를 외우는 것은 의미 없음.
대장경 전체가 화두 하나에 응집.
각자 다른 색의 등을 켜고 있기에
강요해서는 안되는 지식.
무문관 12칙 : '암환주인'
서암 사언 화상은 매일 자기 자신을
"주인공!"하고 부르고서는
다시 스스로 "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깨어 있어야 한다!", "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예!예!"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할 정진 수행.
남들이 보기에 괴짜같은 서암스님의 행동.
주(주인)객(손님 : 눈치보는 존재)전도.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의 소원 : 내 집 마련.
주인공 == 주인+공 : 주인의 존칭.
종교 간 타협, 조화가 중요?
'주인' 노릇을 하는 신 : 인문학 관점에서 모든 신은 죽어야 함!
성경, 코란을 따라야 사는 그런 의미의 종교는 무의미.
내가 주인공이냐 경전이 주인공이냐.
초월자를 모시는 종교는 신이 '주인공',
우리는 '노예, 손님'.
불교는 그럴 수 없음 :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하니까.
성불하라 == 부처(주인)가 되라.
부처가 태어나서 외친 말, '천상천하유아독존',
'내가 존엄, 존귀한 주인이다'
!= '내가 존엄하니 복종하라!',
!= '내가 주인공이니 너희들은 다 손님!".
불국토 : 모든 사람이 스스로 존귀하고
주인으로 여기는 곳.
장미 화원 : 일률적인 꽃으로 길들여지고 통제받는 곳.
불교든 기독교든 무언가 초월적인 종교적 존재를 이야기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
"주인공!"했을 때 스스로 "네!"라 대답할 수 있는가.
사랑은 강요가 아닌, 자발적으로 했을 때만 의미 있는 것.
사랑은 그 대상을 자발적으로
또다른 주인으로서 공경하는 것.
배우자든 부모든 나에게 잘해주는 것은 당연한게 아니라 고마워할 일.
사랑의 최악의 발언 : 사랑한다면 이렇게 해줘야 돼!
진정한 사랑은 그 상대를 주인공으로 생각하는 것.
'부처'가 가진 핵심 의미 중 하나로
'주인'을 꼽은 서암스님.
'주인'임을 다짐해도 때때로 '손님'이 되어버리는 마음.
'남에게 속는다' == '남에게 휘둘린다'.
고대 인도의 초월적 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된 불교.
그럼에도 타락한 불교에서 불상 등 다른 주인을 만듦.
니체 : '주인공'을 생각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철학자.
'신은 죽었다' == 인간이 주인이 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기존 책이 너무 안 팔려 나름 쉽게(?) 쓴 책,
책의 초반에서 이 책을 읽고
낙타->사자->아이로 되어야 한다.
낙타 : 수동적으로 사람을 따름.
사자 : 운송 수단으로 활용할 수 없음(모든 것 부정),
주인이 되려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꼴.
아이 :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놀며 즐거워함.
자신이 아닌 타인이 원하는 것에 따라
진학, 스펙쌓기, 취직, 결혼하는 사람들.
중요한 순간 내가 '주인공'임을 각인시키자.
유교사상이 널리퍼진 남송시대 기준으로
12칙은 위험한 발언.
불교가 가진 힘 : 사문불경왕자론(동진시대 혜원스님),
불교 출가자 사문은 세속을 떠났으므로 자기 어버이나
속권의 지배자 국왕을 예경할 필요 없다.
군부 시절 스님 집합 명령에 저항하며 "네가 내려와라!".
부모가 원하는 자식상 : 말 잘 드는 아이, 그러나,
진정한 교육은 남 말이 아닌 스스로의 말을 듣게 하는 것.
결혼조차 허락받는 자녀들.
주인으로 키우지 않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드는 후회 : '잘못 키웠구나'.
본인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며
그에 따라 잘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진정한 효도.
스스로 손님의 자세로 사람을 대하면 사랑을 못받음.
무문관의 48개 중 유일하게
실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화두.
스스로 위축되고 불안할 때 실천하라.
불국토에 앞서 불가정부터.
종교의 순기능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종교의 가장 악랄한 측면은
인간을 누군가의 노예로 종속시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란
말이 있어 예수를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케 되므로
언뜻 보면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국, 믿음 그 자체에 고착시키기 위한
고도의 기만술인 것이다.
종교의 또 다른 악랄한 측면은
살아있을 때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영원무궁토록 이어질 것만 같은
막연한 공포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선 윤회, 해탈, 극락, 지옥,
기독교에선 천국과 지옥,
카톨릭에선 여기에 더한 연옥이란
기발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해당 종교가 제시한 바람직한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영원한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는 어마무시한 겁박.
나름 똑똑이들은 인간들을 자기 입맛에 맞게
사육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종교임을 알아보고 갖가지 교리를 개발하고
예술과도 융합함으로써
사람들이 계몽되기 전까지 매우 효과적인 수단으로
불교든 기독교든 유교든 가리지 않고
강력한 통치 수단으로서 종교가 기능했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예수의 행적 가운데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비록, 어린 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을 갖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단 얘기지만
다른 뜻으로 해석하면 어린 아이와 같이
순전한 주인공이 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경지에 이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불립문자를 주장한 선종과도 같이
복잡한 율법을 단 두 항목으로 함축했다.
"신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물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한 것 자체는
난 부정적으로 본다.
사랑할 사람은 사랑할 수 있겠으나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은 절대 사랑해선 안된다. .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갑질 내지
지배와 피지배의 고리는 개개인 스스로가
주인공이란 생각을 갖고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복종하지 않겠다는 용기를 갖고
진정한 주인공으로 살아간다면
상당 부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Hsu7a96b9Vw&list=PL5WMTtfpXrft7m-zCOjeckIA_PM66_-fA&index=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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