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강. 나비꿈 이야기
제물론 : 장자의 정신을 근사한 산문 형식으로 표현.
한가한 날이 없는 현대인들.
지루함, 소요유의 전제.
우리에게 필요한 격렬한 게으름.
-제물론
옛날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고
스스로 유쾌하고 기분이 좋았기에
자신이 장주라는 걸 알지도 못했다.
갑자기 깨어나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
이것을 '물화(타자와 함께 변화한다)'라 한다.
프로이트, '꿈이란?
억압된 것이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가난한 사람들은 꾸지만 부자들은 안꾸는 돼지꿈.
나비가 아닌 생각이 많은 인간이기 때문에 꾼 나비꿈.
나비로 상징되는 자유에 대한 장자의 느낌.
깨어난 상태는 별로 안좋아서 별다른 묘사가 없음.
인식론적, 철학적인 어려운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제물론편.
장자의 애정 : 철학적인 주제로 어려워 하는 제자들에게,
"나비꿈이라고 생각해, 얘들아,
무겁게 생각하지 말고
봄날 꿈처럼 가볍게 생각하자.
대붕이 아니라 나비여도 된다.
어쨋든 나는게 중요하니까."
좁은 우물 안에 갇혀 사는 삶도 괜찮다,
작은 꿈처럼 보라.
우물 안에 있지만
우물 모양의 하늘이라도 보는게 곧 나비꿈.
실제로 살기란 쉽지 않은 대붕의 꿈.
불행이란? 좋아하는 곳이 아닌, 싫어하는 곳에 있음.
행복하지 않은데도 버티는 우리.
불행하다는 의식이 중요한 이유 :
그래야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음.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속이지말라.
"장주인지 나비인지 모르겠다" == 마음을 비웠다.
장자의 노파심 :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나비꿈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제물론을 그냥 지나치면 어쩌지?"
훌륭한 사람 : 정체, 직업을 알 수 없는 사람,
비워져 있는 사람이기 때문.
[첨언] 반대로 음흉한 사람일수도 있으므로
정말 좋은 사람인지 자세히 살펴야.
타자에 따라 다른 '나'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나'가 아닌 '나들'.
'나들' 중 하나가 대장격인 '나'.
'나들'을 모르면 자아가 하나밖에 없는
상태가 안 좋은 사람.
비트겐슈타인, '나'를 일인칭 단수 취급해서
생기는 문법적 착각.
만나는 많은 사람에 맞춰
자아를 만들어 나가는 우리.
똑같은 구멍이지만 바람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
타자가 사라지면 아무도 안 읽는 책처럼
마음의 서가에 꽂혀 있는 자아,
가끔 생각나며 펼치면 그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
상대가 어떤 타자를 만나
어떤 자아들을 만들었는지 모르므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과거의 자아들을 없애고 마음을 비워야!
충분히, 지속적으로 났던 바람 소리는
우리 내면에 오래된 책처럼 울림.
어느 날 추억이 펼쳐지겠지만
그때의 자아는 나타나선 안됨.
내가 검사라면 죄인에겐 검사처럼 굴어야 하나
아내를 만났을 땐 달라야!
나의 구분을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닌 타자.
자유가 있어도 중앙 유라시아의
모든 지역에 머무는 것이 아닌 유목민.
기존의 자아를 잊어야 생기는 새로운 자아.
누구도 못 만났다면 멍하지 있을 수 밖에,
내가 누구인지 결정하지 말라!
나비로서의 자아만,
혹은 장주로서의 자아만 유지하는 것은 금물.
내 안에 자아가 많고 앞으로 만들어질 자아도 많으니
하나 정도 없어져도 괜찮음.
죽을 때 혼자 죽는게 아니라 나들과 함께 죽는 것.
여물위화 : 공수 이야기에서 '사물과 함께 변화한다'.
제물론 편 여희 이야기에서
"단지 크게 깨어날 때만
우리는 큰 꿈을 꾸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20여년 동안 지속되었던 장자 꿈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날,
애틋함과 아련함이 교차하는 작은 느낌마저
상쾌한 바람으로 씻어보는 날입니다.
안녕! 장자!
"지금까지 나는 장자가 된 꿈을 꾸었다."
자유롭고 당당한 장자였고
스스로 유쾌하고 기분이 좋았기에
자신이 나라는 걸 알지도 못했다.
갑자기 깨어나니 분명히 나였다.
내가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장자가 내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와 장자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
이것을 '물화'라고 한다.
장자의 오랜 꿈인 대붕의 꿈이 나비의 꿈으로 변한
그 짧은 날의 이야기.
흔히들 누구에게나 한결같은 사람을 훌륭하다고 한다.
완전히 틀린말은 아니지만 알고보면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오히려 상황에 걸맞는 여러 자아를 갖고 있어야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자아로 산다면 미쳐버릴 수 있으니 경계해야하겠지만.
나는 야훼는 없어도 예수는 있었을 것이라 본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껏 추앙하지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미친 사람처럼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십자가 처형을 당해도 부활할 것이라 떠벌이며
사이비 교주처럼 돌아다녔지만
야훼의 교리를 두 문장으로 함축하고
스스로도 그 교리를 온몸을 던져 실천했음에도
기득권의 모함을 받아 마치 소크라테스와도 같이
십자가 처형이란 비극적 결말을 맺었기에
죽어서도 그를 잊지 못했던 무리들에 의해
기독교란 종교가 널리 퍼졌다고 본다.
마태복음 28장 11절~15절을 보면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의 시체가
사라진 것을 본 장로들이 군인을 돈으로 매수하며
제자들이 부활로 위장하기 위해
시체를 훔쳐갔다라고 총독에게 보고함으로써
부활이 거짓이란 소문이 유대인 사이에
두루 퍼지게 하라는 장면이 나온다.
성경 기록자는 부활의 증거를 훼손을 경계하여
이 구절을 넣었는지 모르나
난 이 구절이야말로
부활 사건이 위조라는 확실한 증거라고 본다.
신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예수에게도 수많은 자아가 있었다.
어린 아이를 곁으로 오라해서
어린 아이와 같이 즐거이 지내는 자아,
판타지겠지만 극소수의 제자에게만 드러낸
빛과 내 아들이란 천상의 목소리로 뚤러쌓인 신적 자아,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공력을 행사하는 자아,
죄 없는 자만 돌로 치라며
문란했던 여성을 용서하는 자아,
예루살렘 입성 후 성전에서의
장사하는 자들을 향한 거친 자아 등
수많은 자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성자에게도 여러 자아가 있고
심지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야훼는
비록 자신은 사랑이 넘친다고 주장하지만
결벽증적 자아,
질투에 불타오르는 자아,
의심증이 있어 틈날때마다 누군가를 시험하는 자아,
자신을 화나게 한 존재들을 학살하는 자아 등
여러 자아가 있다.
이와 같이 신적 존재조차 불가능한데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위험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경에서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이 있는데
정작 신이라는 자신들은 왜
믿지 못할 것을 믿지 못하는
지극히 정상인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줘야하는지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미스테리다.
얼마 전, 꿈에서 죽은 대학 동기를 만났었다.
그 친구는 나와 같은 연구실에서 지냈지만
결이 맞진 않아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었다.
이 친구는 스스로에 대해 굉장히 높은 기준을 갖고 있어
충분히 훌륭한 논문을 쓰고 졸업할 수 있었음에도
결국 논문을 쓰지 못해
수료 상태로 가기로 했던 회사로 들어가
나중에 논문을 쓸 예정이었다.
폴란드로 장기 출장을 갔던 이 친구는 결국,
숙소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다.
내가 알기로 이 친구는
결코 자살할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 동안 어떠한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자살로 위장한 타살이다란 유족의 주장으로
사인을 밝히련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 자살로 종결되어
미스테리로 남게 되었다.
이 꿈이 특이한 것은
한 번의 꿈에서 무려 세 번이나
이 친구를 만났다는 것이다.
어느 방 한 켠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장면이었다.
두 번은 모른 채하고 지나가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에게 다가가
'OO야 뭐하냐?' 라고 물어보니
마저 쓰지 못한 논문을 쓰고 있댄다.
꿈에선 그 친구가 죽은 줄 전혀 모르고 있었으므로
그래 열심히 써서 꼭 좋은 논문 남기기 바란다며
격려하고 그 친구도 내게 회사 생활하기 괜찮냐고 하자
몇 마디를 더 나눈거 같은데 어떤 내용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잠에서 깼는데 순간 소름이 확 밀려 왔다.
'아! 이 친구 죽었지?'
중요한 것은 평소에 이 친구를 생각한 적이 전혀 없는데도
불현듯 꿈에 너무도 생생히
세 번씩이나 나타났다는 것이다.
귀신을 믿는 사람은
귀신을 본 것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겠으나
난, 뇌의 작용이라고 본다.
어쨋든 친하진 않았지만
이 친구 사망 소식을 듣고 믿지 못할만큼
한 동안 멍한 상태로 있었을 정도로 놀랐었기 때문에
어딘가 깊숙히 숨겨져 있던 충격의 기억이
이제서야 꿈을 통해 분출되었다라고 본다.
난 한 번도 돼지꿈을 꾼 적이 없다.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난과 처절하게 싸운 기억 또한 없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대박친 삶을 살진 않았지만
적어도 운수 오진 삶을 살진 않았단 조그마한 증거인 것 같아
여기에 만족하며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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