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하는 사람이 전쟁터에서 멀어질수록 심해지는 전쟁.
국가가 공동체 수준으로 작아지면 일어나지 않을 전쟁.
물의 세계 : 한 남자, 흔적이 남지 않는 세계.
육지의 세계 : 공자, 흔적이 남는 세계.
-달생
공자가 여량이라는 곳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곳 폭포는 삼십 길이나 되었고
그 물거품이 사십리나 튈 정도로 험해
자라나 물고기 등도 헤엄칠 수 없는 곳이었다.
한 사나이가 그 곳에서 헤엄치는 것을 보자마자
공자는 그가 고뇌가 있어 자살하려 한다고 판단해
먼저 제자들을 보내 물가를 따라가
그 사나이를 건지게 하였다.
그 사나이는 수백 보의 거친 물길을 지나
물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머리카락이 물결에 풀어진 채 노래를 부르며
둑 바로 아래 잔잔한 물에서 헤엄쳤다.
공자 : "나는 그대가 귀신인 줄 알았네.
그런데 지금 보니 자네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군.
물을 건너는데 길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네."
남자 : "없네! 내게는 길이 없네.
나는 과거에서 시작했으나
삶에 깃들어 명을 이루고 있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나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물속에서 밀어내면 나도 같이 밀려 나오지.
물의 길을 따를 분,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네.
이것이 내가 물을 건너는 방법이네."
공자 : "과거에서 시작했으나 삶에 깃들어
명을 이룬다는 그대의 말은 무슨 의미인가?"
남자 : "내가 육지에서 태어나
육지에 편했던 것이 과거이고,
내가 물에 깃들어 물에 편해진 것이 삶이며,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명이네."
공자의 천하무도 :
하늘 아래 길이 없어 보이나 길은 있다.
공자, 군군신신부부자자(상명하복),
전국시대에 길이 없어보이는 것은
군주, 아버지, 남자, 선생의 권위가
없어서이니 다시 세워야 한다.
먼지에 싸여 있고 잡초가 우거졌어도
육지에는 길이 있다고 생각한 공자.
물에는 길이 없으니 내가 살아가며 찾아야 함, 도행지이성.
두 세계를 모두 살아보고 한 세계를 결정한 사나이.
모래 폭풍이 불면 길이 없어지는 사막,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지배받지 않음.
여량 : 황하 북쪽의 50미터 크기의 폭포.
제자를 먼저 보냄 :
위계질서를 상징하는 공자의 세계.
육지에선 사랑도 지배와 복종의 형식일뿐.
수영이야기의 핵심 : 공자와 사나이의 경계선.
'이렇게 하면 돼'라 정해진 길은
억압체계에서 만든 법,규범,형식.
물의 세계 : 포정이야기에서의 매지어족,
타자가 존재하는 세계.
물에서는 길이 없다,
이 길이 맞다고 착각하는 순간 빠져 죽을 가능성이 큼.
각자의 삶은 교환 불가능.
공자의 길 : 일자가 다자를 지배하는 질서 구조를 만들어
통일하면 갈등은 사라질 것.
여씨춘추 귀생편, "핍박받는 삶은 죽음보다 못하다".
물에 사는 사람들 : 핍박받는 삶을 떠난 사람들.
순리를 거슬러 잠 쫓으며 살고
일하기 위해 억지로 자는 우리.
공자의 입장 : 물의 세계가 핍박받는 삶,
남자의 입장 : 육지의 세계가 핍박받는 삶.
물에서는 물이 길을 결정.
바람 안 불 때 가장 위험한 돛단배.
바람을 타는 대붕처럼 물을 타는 남자,
남자를 자유롭게 하는 물.
조건적 자유 : 타자와 함께 간다.
우리에게 타자가 되고
우리를 봄이 되게 하는 거대한 바람.
물을 타야 물에서 자유로워지듯
바람을 타야 자유로워지는 대붕.
혼자 가는 것이 자유가 아님,
자신이 아닌 타자를 타면 멀리 갈 수 있음.
장자의 가르침 : 타자와 같이 가야 힘이 세짐.
물속 사람들 입장 : 이곳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면
수탈하러 들어올 수도 있을텐데 쟤 왜 저러지?
여기까지 와서 공자가 물을 막아 문명의 질서를 만들어도
다시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므로 말리지 않음.
타자와 제대로 만나고 사랑하려고 하면 무의미한 길.
두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더 많은 세계를 가질 수 있음.
한 세계만 알고 머물면 그 세계에 잡혀버림.
공자보다 더 넓은 세계를 알아 경험하는 사나이.
때때로 두 세계중 어느 세계를 택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있다.
회사 생활에서는 임원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평생 실무자의 길을 갈 것인지의 기로.
어느 종교에 속박되어 영생을 보장받을 것인지,
아니면 그딴 것은 없고 죽으면 끝이니
자유롭게 살 것인지의 기로.
분명한 것은 어떤 것에 매여 있게 되면
그 길의 정상에 오르기까지
중간중간 목표 세우고 성취해나가는
맛을 누릴 수 있을 반면,
언제 어느 때 그 자리에서 내쳐질 것인지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반면, 그러한 것을 과감히 포기하면
벼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때론 본의 아닌 모욕을 당할 수 있으나
적어도 보이지 않는 속박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축복과 공포 장사 시스템이다.
내가 유독 기독교를 까는 이유는
다른 종교는 잘 모르고 그나마 기독교를 잘 알아
가장 만만해서 그런 것이다.
나는 종교에 매인 삶과 그렇지 않은 삶 모두를 경험했다.
적어도 내게 있어 전과 후의 삶을 비교하면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후의 삶이 편하다.
기독교의 사랑은 흔히들 아가페적 사랑,
절대적 사랑이라고 하는데
결코 그러하지 않은
가장 폭력적인 형태의 사랑이다.
그리고, 공포를 조장하는 수준
역시 극대화 되어 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영원무궁토록
고통을 받게 되어 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더라도
그가 영혼을 구원한 실적에 따라
화려한 맨션에 살 수도, 아니면
집도 절도 없이 영원히 방황하며 살 수도 있다.
성경에 기록된 천국은 누구나 영원무궁토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왕국이 결코 아니다.
철저한 성과주의적 세계인 것이다.
물론, 대체로 우리가 흔히 보는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 이렇게 심각하지만은 않고
교회란 간판은 걸었으나
일종의 사교단체처럼
적당히 즐길 수 있는 곳이 더 많을 것이다.
즉, 성가대를 하면 노래를 열심히 할 수 있고
봉사부에 들어가면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가서
봉사도 할 수 있는 등 건전한 활동은 꽤 있을 것이다.
또한, 경치 좋은 곳에 기도원이 있는
좋은 교회를 다니면 한번씩 기도원에서 맑은 공기 쐬며
자기 수양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천국에 들어가는게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곧이 곧대로 믿으면 미쳤다고 기독교를 믿겠는가?
하기야, 8백만분의 1도 안되는
로또 당첨 확률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첨될 수도 있단 믿음하에 수많은 사람들이
로또를 사대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다만, 믿음이 없는데
교회를 다니면서 즐거움을 누리려면
겉과 속이 다른 시간들을 보내야할텐데
자신을 속이는게 그리 즐거운 일일지는
각자의 처지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속이는게 편하고
교회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좋으면
그렇게 사는 것도 한 가지의 방법이 될 수는 있겠다.
기독교는 축복과 공포를 조장하는 측면에서
끝판왕격이지만
사실, 종교의 기본 형태는
축복과 공포 장사 프레임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종교에 매인 삶을 살 것인지,
종교를 적당히 이용하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종교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삶을 살 것인지는
각자가 선택할 문제겠다.
나는 어떠한 종교에도 구속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였으므로 마지막 길을 선택하였고
뒤늦게라도 그 길을 찾은 것에 대해 희열을 느낀다.
다만, 기독교적 시대적 배경하에
바흐, 베토벤, 멘델스존 등 대작곡가들이 남긴
교회음악이란 위대한 유산이 남아 있으니
크리스찬은 아니지만 목적이야 어찌되었건
아름다운 음악 그 자체를 맘껏 즐길 수 있어 좋다.
'동양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신주 장자수업 [48강. 나비꿈 이야기 : 호접지몽] (1) | 2024.03.23 |
---|---|
강신주 장자수업 [47강. 임종이야기] (4) | 2024.03.22 |
강신주 장자수업 [45강. 애태타 이야기 : 자유인의 치명적인 매력] (3) | 2024.03.16 |
강신주 장자수업 [44강. 원숭이 이야기 : 조삼모사, 사랑하는 마음의 은밀한 이중성] (7) | 2024.03.16 |
강신주 장자수업 [43강. 여우이야기 : 자유를 지켜보는 전사의 마음] (0) | 2024.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