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강신주 장자수업 [39강. 맹손재 이야기 : 죽음, 그 집요한 관념을 해체하며]

dirigent21 2024. 3. 13. 12:28

 

죽음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중 두번째.

-대종사

안회 : "맹손재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곡은 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고

마음속으로 슬퍼하지 않았으며

장례를 지낼 때 애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 가지가 없음에도 그는

노나라에서 장례를 잘 치른 자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 내실이 없는데도 그런 명성을 얻는 경우가

실제로 있으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공자 : "맹손재는 죽음과 장례에 대한 앎을 넘어

그것을 모두 실천한 사람이다.

장례를 간소히 치르려해도 뜻대로 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이미 간소히 한 것이 있다.

맹손재는 태어난 이유나 죽

는 이유를 알려 하지 않았고,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이 부차적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변화에 따라 하나의 사물로 태어났다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변화가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장차 변화한다면

어떻게 변화하지 않음을 알겠는가?

장차 변하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이미 변화했었음을 알겠는가?

단지 나도 그렇지만 너도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는 몸이 망가지더라도

마음을 소모하지 않았고,

몸을 떠나려 해도 죽음에 신경쓰지 않는다.

맹손재만이 홀로 깨어난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곡할 때 그 또한 곡을 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을 따른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신을 나라고 여기고 있을 뿐인데

어떻게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것이

실제로 내가 아님을 알겠는가?

너는 네 자신이 새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다고,

혹은 네 자신이 물고기가 되어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고 있다고 꿈꿀 수 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나도 깨어 있는 자인지

아니면 꿈꾸고 있는 자인지 모르겠구나!"


소요유 : 유목민적 전통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장자.

정착민적 관점 :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그들의 죽음.

죽으면 감각을 못 느끼기에

고통스럽지 않은 나의 죽음.

2인칭 : 사랑하는 사람들,

3인칭 :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

내 영역 바깥에 있는 사람들.

전 세계적으로 3인칭이 없는 사람 : 예수, 부처.

디아스포라(diaspora,

타의에 의해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문화/지역으로 흩어진 사람들),

몸은 새로운 곳에 마음은 살던 곳에,

몸은 50대지만

머릿속에선 20대가 떠오를수도,

떠나온 것에 대한 향수(Nostalgia).

정착민의 이상형 : 모두를 2인층으로 보는 성인,

2인칭이 많을수록 훌륭한 사람 취급.

정착 생활, 농경 사회에서 발달하는 종교.

유목민에게 내 집, 내 땅이란 생각은 없다.

정착민이 자신의 땅에 애착을 가지듯

유목민이 머문 곳은 그들이 사랑하는 곳.

유목민에게 그들이 사랑했던 곳이 디아스포라는 아님.

유목민의 감각 : 20대의 나/50대의 나 모두 좋음,

유라시아가 내 땅이기도 아니기도,

2.5인칭(2인칭과 3인칭 사이에서 세상을 보는 것).

유목민에겐 정착민의 100배 이상의 공간이 필요.

유목민의 땅에 사랑하는 사람을 대입한다면?

어디론가 떠나면 좋았던 기억만 남음,

있을 때 충분히 사랑하되 떠난 후 그리워하지 않는다!

유목민의 이상 : 어디를 가도 다 행복하게 사는 것.

지금 살지 않는 곳? 남의 땅이 아닌 내가 갈 수 있는 땅.

임시거처 : 나는 가족 곁에 임시로 머뭄,

가족도 내 곁에 임시로 머뭄, 누구든 떠날 수 있다!

떠날 수 있는데도 같이 있는 것은 행복 때문.

2.5인칭적 감각이 없을 때 내 것을 빼앗기면 불행해짐.

유목민 사회의 전통 : 고통/우울 < 유쾌.

소요유의 감각 : 내가 옮겨간 그 곳이 근사한 곳,

떠날 수 있음에도 머무르기에 더욱 가치 있는 것.

유목민적 사유에서는 슬퍼할 일이 아닌 '죽음'.

'저승으로 간 걸까?'와 같이

어두운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는 정착민.

눈물의 만리장성 :

눈물의 바깥쪽은 죽은 자/안쪽은 살아있는 나,

나는 살아 있는 정착민이라는 강한 의지,

나의 순서가 온다는 생각 대신

나는 살아있다는 의식뿐,

20대의 젊음에 집착할수록

50대를 못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정착민의 경우, 마을에서 오래 살았을 때

누군가 이사 가면 슬픈 건

내가 떠나는 것이 무서우므로.

공자는 수석장례지도사.

묵자의 '비유'편에서 '유학을 비판한다' 이야기,

가을이 지나 큰 초상이 벌어지면

온 가족들이 물리도록 먹고 마실 수 있고,

작은 초상 몇 개만 마쳐도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은 남의 집에 의지해 살찌고

남의 땅에 의지해 존귀해진다.

그들은 부자가 상을 당하면 크게 기뻐하며

'이거야말로 입고 먹을 수 있는 기회다'라

즐거이 말한다.

맹손재 같은 사람에겐

필요하지 않은 장례 지도사.

유학이 망가져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맹손재.

현해 이야기 : 60세 할머니가 거울을 볼 때

옛날의 '나'가 아닌 지금의 '나'를 봐야!

맹손재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단지 먼저 텐트를 걷어 가신 것.

왜 사는지 묻는 것은 지금 삶이 안좋다는 뜻.

삶이 힘들 때는 이유를 알아도 힘듦.

장차 변화한다는 것 == 태어났다는 것.

장차 변화하지 않게 되는 것 == 죽은 것.

어떻게 변화하지 않음을 알겠는가?

== 지금 모습으로 태어나기 이전을 어찌 알겠는가?

이곳의 삶을 부정하지 않지만

집착하지도 않는 맹손재,

지금까지 행복했다는 기억만 가지고

새로운 곳으로 넘어가는 사람처럼.

장자의 바램 : 눈감을 때쯤 되면

유목민처럼 떠나는 사람이 되길.


인간의 가장 허접스러운 면은

죽은 자를 처리하는 태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내 아내가 죽는 것을 보면

너무나 슬플 것 같다.

그러나 그 슬픔은 자신의 마음 속에 묻어야지

왜 민폐를 끼치고

쓸데 없는 장례 논쟁을 벌여야하며

더 나아가 아무 상관 없는 자들의

배를 불려야 하는 것인가!

어리석은 인간 세계에서 장례 문화 내지

장례 비즈니스가 없어지는 날은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속히 없어져야할 인습 가운데

하나가 장례 전통,

장례 문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가장 어리석은 자 가운데 하나가

공자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