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강신주 장자수업[12강. 동시 이야기]

dirigent21 2024. 3. 10. 14:02

 

추상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제물론.

문맥주의자인 장자 : 보편적인 것은 없다.

분류할 때나 쓰는 구분 기준.

삶은 책으로 배울 수 없고 맨땅에 헤딩하면서 배울 수 있다.

동시 : 모두를 같게 여기다.


-제물론

설결이 스승 왕예에게 물었다.

설결 : "선생께선 외물로부터

누구나 옳다고 동의할 수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왕예 : "내가 어찌 알겠느냐?"

설결 : "선생께선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 아닙니까?"

왕예 : "내가 어찌 알겠는냐?"

설결 : "그러면 외물이란 알 수 없다는 겁니까?"

왕예 : "내가 어찌 알겠느냐?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말이나 좀 해보세.

도대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게

사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알 수 있나?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는게

사실 아는 것이 아니라고 알 수 있나?

이제 시험 삼아 자네에게 묻겠네.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겠지만

미꾸라지는 그럴까?

사람이 나무 위에서 자면 겁이 나서 떨겠지만

원숭이도 그럴까?

이 셋 중 어느 쪽이 올바른 거주지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자네는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즐겨 먹지.

이 넷 중 어느 쪽이 올바른 맛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맺고,

순록은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놀지 않는가.

보장이나 여희는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물속 깊이 들어가 숨고,

새는 보자마자 높이 날아가 버리며

사슴은 보자마자 급히 도망가 버린다네.

이 넷 중 어느 쪽이 올바른 아름다움을 안다고 하겠나?"


남에 대한 오해를 막는 두 가지 원칙 : '모든'과 같은 추상적 개념,

부정어를 조심하여 개념의 반대쌍으로 지레짐작하지 말라.

거짓말쟁이의 역설, 크레타 사람의 거짓말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크레타 사람이 말했다가 참, 거짓? 모름)

-> 버트란트 러셀의 역설

'모든'에 집착하면 문장이 역설이 될 수 있다.

'모든'을 본 적 없으면서 어찌 '모든'을 알겠는가?

논리적인 사람을 만나면 때론 짜증나는 이유 :

그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단어의 정의로 꼬투리 잡을 때.

'모든'의 의미는 '대략', '대충', '짐작컨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거짓말쟁의 역설이 의미가 있으려면

'모든'을 곧이곧대로 해석해야.

글자 그대로 정의하는 논리는 매력이 없다.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 사랑한다,

왜냐하면 미움과 사랑의 범주 문제가 아니므로.

뭔가 부정할 때 쌍으로 연상되는 개념

(자본가 vs. 노동자, 둘 다 아닐 수도 있음)에 매몰되지 않도록.

개념의 반대쌍에 집착하지 말라.

서양의 전통 : logic vs. rhetoric

(수사학, 문장과 어휘를 사용하여

설득 효과를 높이는 표현 방법 연구),

중요한 건 레토릭.

한 문장을 보편적으로 밀어붙어야 하는 로직.

로직의 전통 : 플라톤, 소크라테스.

수사학의 전통 : 소피스트.

논리학 관점에서 보면 수사학은 궤변으로 보임.

수사학의 핵심 :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사실을 자각,

논리학보다 풍부한 전통.

동아시아에서 논리학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 : 성숙해서.

그러나, 서구화가 불러온 말싸움의 전쟁.

논리보다 수사학적 사고 방식을 길러라.

설결 : 이 빠진 사람, 논리적인 사람을 상징.

왕예 : 왕성한 어린 아이같은 사람.

말발에 사로잡히는 중고생과 달리 느낌으로 아는 어린 아이.

설결 vs. 왕예 : 논리로 말발을 세우다 이가 빠지는 격, 논리의 무용.

내가 어찌 알겠는가? != 모른다.

과연, 올바른 거주지란 것이 여기 있는가.

'나'와 '너'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을 때 발생하는 논쟁.

나가르주나(불교 최고 이론가), 니체, 비트겐슈타인 :

인간의 해묵은 편견 중 하나로서

주어, 술어를 분리하여 주어가 가리키는 것도 있고

술어로 가리키는 것도 있다 생각해서 일이 복잡해진다.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는 착각은 언어적 습관.

바람이 분다 : 안 부는 바람이 어딘가 있는 것 같은 착각.

'나'를 쓸수록 강해지는 집착.

어제 비와 다른 오늘의 비.

날마다 새로 시작하는 나.

비트겐슈타인의 문법적 착각(grammatical illusion) :

주술 관계에 대한 집착이 사라져야 세상이 보인다!

비가 올 때 안 오는 비에 집착하지 말라.

집착으로부터의 해방 : 불교의 해탈,

니체에서의 초인. 장자적으로는 대붕.

죽으면 죽는 것이고 태어나면 그냥 태어나는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미적 기준을

굳이 이해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할 때

불편 내지 갈등이 발생한다.

꽤 오래 전 '나는 가수다'란 프로그램에

김연우와 임재범이 나온 적 있었다.

둘 다 워낙 노래를 잘하는 가수인데

김연우는 미성에 음정, 박자가 칼같이 정확한데다

완벽한 발성을 하는 사람이고

임재범은 라커로서 야성미가 넘치는 사람이다.

그 당시, 김연우는 완벽한 노래를 불렀고

임재범은 음반에서 듣는 것과 같이 완벽하지 않고

군데군데 음이탈이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김연우 대신 임재범에 열광했고

이후, 김연우는 내 기준에서 최고의 가수였음에도

중도 탈락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분통을 터뜨렸다.

저 청중들 귀가 쓰레기 아닐까,

어떻게 저렇게 수준 낮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최고 중의 최고 가수들을 감히 평가하겠다고 하는거지?

라고 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얼마나 우스운 행동인가?

사람마다 제각기 미적 기준이 다른데

누가 감히 절대적 기준을 강요하겠는가?

그럼에도, 이 가수가 최고네 저 가수가 최고네 하며

얼띤 논쟁을 벌인다.

이 얼마나 우스운 행동인가?

자기가 좋으면 그걸로 그만이지

남에게 걍요해서 안된다.


고전 음악에 심취하는 사람 가운데

대중 음악을 천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그런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중 음악을 이해하면서부터

성악적으로 대중가요를 노래를 부르는게

때론 굉장히 촌스럽다는걸 알게 되었다.

대중 음악 가수 중에서도

성악가보다 훨씬 섬세하고 복잡다단한 선율과 감정을

능숙하게 표현하는 분들이 있고

숨소리만으로도 감동시키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심지어, 성악적으론 족보도 없는 이상한 발성임에도

그 목소리에 원초적 감성을 자극하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으니까.


종교 가운데 유독 기독교가 욕을 많이 먹는다.

사람은 모르는 것에 대해선 겸손해야 한다.

아는 영역, 모르는 영역,

그리고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영역이 존재하는데

어찌보면 맨 마지막 영역이 가장 넓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하찮은 인간으로선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야훼란 절대적인 신을 들여와

그가 모든 것을 창조했다 주장하면서

알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더 나아가 원죄란 이름으로

인류에게 이상한 죄를 덮어씌워

육화한 예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토록 슬피울며 이를 갈 것이란

해괴망측한 교리를 설파한다.

구약성서를 읽어보라.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기까지 유대인들이

얼마나 많은 이방민족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는지.

물론, 인신 제사를 지내는 등

기독교보다 더했음 덜했지 더하지 않은

이상한 종교들이 많았으나

적어도 이들은 다른 전통을 가진 자들을

모조리 없애야겠단 생각은 안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는 절대 안된다는 신념하에

자기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없애야겠다는 태도로 가나안을 향해 진격한다.

자기들이 정의이고 나머지는 불의라고 주장하나

엄밀히 말하면 빌런 대 빌런의 싸움이었고

그 와중에 엄하게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신실한 크리스찬으로서 내 아내와 나는 교회에서 결혼했으나

지금의 나를 보고 아내는 날 딱하게 여기는 것 같다.

그래도, 난 전혀 상관 없다.

다행히 내 아내는 목사한테 가서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할 정도로

열심인 편은 아니라서 큰 갈등은 없다.

나 역시, 내 아내가 교회가는 것을 좋아하니

쓸데없는 짓 하지말라고 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걸 강요하는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는

수천년 간 벌어진 비극의 역사를 보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다.

불행히도 풍요로워 보이는 오늘날에도

SNS를 통해 이러한 기준들이 너무나 쉽게 강요되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그 와중에 상처받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장자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누군가 돈지랄을 하든, 유식한 체하든,

그런 것에 초연하여 얼마나 모자라고 속이 공허하면 저럴까,

얼마나 못났으면 자랑할게 저런거 밖에 없을까하며

한바탕 웃음으로 넘기는 가운데,

외물에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 즐기며

대자연의 도를 따라 한 바탕 살다가

때가 되면 순리에 따라

이 세상을 쿨하게 떠난다란 마음가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