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강신주 장자수업[9강. 포정 이야기 : 타자와 함께 춤을]

dirigent21 2024. 3. 10. 13:39

장자의 이상향 : 소인인 포정.

약자를 소중하게 생각한 장자.

포정(포갑,포을,포병 등, 즉, 무명)

포정의 소잡는 것 == 누군가의 마음에 다가서는 것.

-양생주

포정이 문혜군을 위하여 소를 잡았다.

손을 갖다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을 디디고,

무릎을 굽히며 소를 잡는데

설컹설컹, 설뚝설뚝, 칼 쓰는 동작이 리듬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소 잡는 것이 무곡<상림>에 맞춰 춤추는 것 같고,

악장<경수>에 맞춰 율동하는 것 같았다.

문해군 : "참, 훌륭하다.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포정 : "제가 귀히 여기는 것은 도이고,

이것은 기술을 넘어서는 겁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게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온전한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신으로 조우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은 쉬고, 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소의 고유한 결을 따르기에

아직 인대나 건을 베어 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

훌륭한 푸주한은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푸주한이 달마다 칼을 바꾸는 것은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19년간 이 칼로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날은 이제 막 숯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 빈 것처럼 넣어,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기에 19년이 지나서도 칼날이

이제 막 숯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매번 근육과 뼈가 모여 있는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다루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 조심합니다.

시선은 하는 일에만 멈추고, 움직임은 느려집니다.

칼을 극히 미묘하게 놀리면 뼈와 살이 툭하고 갈라지는데

그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머뭇거리다 흐뭇한 마음으로

칼을 닦아 갈무리를 합니다."

문혜군 : "훌륭하다!"

나는 오늘 포정의 말을 듣고

'삶의 기름'이 무엇인지 터득했노라."


소의 결을 존중하는 포정, 소의 결에서 생기는 리듬.

소와 포정의 리듬이 정확히 맞듯 나와 리듬이 맞는 사람.

친구 : 리듬이 맞는 관계.

'내 마음대로'가 익숙한 권력자,

일방적인 관계만 맺었을 문혜군.

상대방이 지치고 힘들 때 넘어지지 않도록

서로의 힘을 주고받는 리듬.

서로 계속 잡으려고 하는 건 리듬이 맞지 않는 것.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리듬타듯 서로를 잡아주는 것.

서로 업어주려는 최선의 관계,

서로 업히려는 최악의 관계.

늘 같이 있어주는게 답은 아니다,

타자를 떠나서 혼자 있어도 됨.

밀고 당기고 기대고 맞춰줘야 하는 춤에서

타자에 대한 신뢰가 중요.

왕의 진정한 깨달음 : 온 국민이 춤 상대여야 가능.

장인과 장인이 만지는 것의 관계만 남는 순간

당당함을 얻는 것.

"신"으로 조우할 뿐에서의 신 : 직관적인 통찰, 육체적 이성,

평상시의 마음과 달리 마음이 손에 가 있는 상태,

낚시에서의 손맛, 마음/손, 손/칼, 칼/소의 결이 하나인 느낌.

마음에 잡생각이 있으면 내 손에 감이 없다.

칼이 망가지는 이유 : 저항이 많이 걸리는 곳,

베서는 안되는 곳을 베기 때문, 역리.

19년간 칼을 안 갈아도 된 이유 :

빈 곳을 잘 찾아 지나갈 경지에 이르러서.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19년을 쓰는 장자.

왜 하필 19년일까?

매지어족(매번 족에 다다른다) :

족(뼈와 살이 모여 힘든 곳, 타자성)은 소마다 다르다.

19년간 포정이 성공한 것 :

수천 마리 소의 '족'을 통과한 것.

16차선의 넓은 길에서 방심하다

생각지 못한 바위에 걸리면 차는 전복됨.

겉보기엔 똑같아 보이지만

더 깊은 관계가 되면 다르다는 것을 안다.

소마다 다른데 어떻게 표준화할 수 있는가?

관념적으로는 유사해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

매번 다른 족으로 인해 매너리즘 없는 희열, 행복.

우리는 그 사람의 족에 닿은 적이 있나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타자들.

남자, 여자 다 거기서 거기다라고 회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

족을 느끼고 경험하는 건 권하고 싶지 않을만큼 어려운 일.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족에 이르게 됨.

누군가와 사랑하고 소통한다는 것은

자신의 칼날을 잃을 수도 있는 일.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도의 관점에서 허의 원리를 깨달아

자기를 온전히 비울 때 세상에서 경험하는

각종 장애물을 잘 극복할 것이라는

처세적 담론으로도 쓰일 수 있다.

강신주 선생님의 해석을 듣고 느낀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풍족한 가운데

왜 그리 외롭고 공허함을 느끼는가이다.

그건 바로, 굳이 타인의 족을 경험하거나

수용하려는 시도나 노력을 하지 않고

일단 회피하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

족을 포용함으로써 타인과 관계를 유지하지 않아도

예전 세상에선 누릴 수 없던 온갖 가상 세계를 즐길 수 있고

타인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대부분의 문제는 손쉽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원초적 외로움은

아직까지 가상 세계가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

만약, 기술이 더 발전하여

가상 세계에 인간의 오감이 매핑되는 것이 실현된다면?

그 때도 인간이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낄련지는 알 수 없다.

19의 의미에 대해선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

10+9로 해서 각 숫자의 의미가 결합된 상징이란 걸.

참고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숫자는 21이다.

1+2==3, 7+7+7==21,

예전에 크리스찬이었을 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예루살렘성에 입성할 숫자,

144000을 가장 좋아했었다.

어쨋든, 이 숫자의 의미가 뭔지를 탐구하는 것은

교훈을 얻는 것과는 큰 상관 없는 일이므로 집착할 필요는 없겠다.

나는 원래는 사람을 좋아하고 항상 그리워하였으나

어려서 항상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점점 익숙해지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보니

지금은 사람을 거의 사귀지 않는 편이다.

어쩌다 말이 통하는 극소수의 사람을 알게 되면

만나서 얘기할 때만큼은 시간 가는 줄 모를 때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조금이라도 '족'이 보이면

얼마 안가 손절하는 그런 속성이 있다보니

남의 '족'을 포용하는 것이

내게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아내와 수십년간 잘 지내면서

행복한 것은 참으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러고 보면 우주적 기운에 의한 천생연분이란 것이

정말로 있는가보다 생각될 정도로.

내게 있어 19년이란 세월은 얼마의 기간일지 모르겠으나

어쨋든 타인이 주는 행복을 경험하려면 극복하긴 해야 할 것이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조금씩 나아지는 법을 터득해나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