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강신주 무문관 : 주인공으로 살기 [42강]

dirigent21 2024. 12. 15. 13:06

조주가 조주선사로 탄생하게 되는 화두 

19칙 평상시도(깨달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

조주스님이 남전화상에게 물었다.
"도란 무엇입니까?"
남전 : "평상심"
조주 : "그렇다면 그렇게 하고자 노력하면 됩니까?"
남전 : "하고자 하면 곧 어긋나게 되네"
조주 : "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어찌 마음을 
항시 고르게 하는 것이 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남전 : "도는 '안다'는 것과도
'모른다'는 것과도 상관이 없다.
'안다'는 것은 착각의 상태이고
'모른다'는 것은 멍한 상태일 뿐이다.
만일 진실로 '하고자 함이 없는 도'에 이른다면
허공처럼 확 트일 것이다.
어찌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겠는가!"
남전 화상의 말이 끝나자 조주스님은 바로 깨달았다.


'평'을 아무 일도 없는

고요한 상태로 이해해선 안됨.
양팔저울이 비어 있는 상태에서
수평이 맞아야 무게를 측정할 수 있음.
외적 요인에 의해 한쪽으로 무게가 쏠렸을 때도
평형을 유지하는 것은 만만치 않음.
평상의 마음이란 그 사람의 고통의 양만큼 이해되는 것.
아무 일도 없을 때 '평'이어야 그 후에도 '평'이 가능.
평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집착이란 양팔저울에 분동이 올라가 있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평'이 유지되어야 
타인을 헤아리고 이해할 수 있다.
분동(집착, 알라야식) : 자신의 마음, 물건 : 타인의 부분.
집착은 소중한 것이 있을 때가 아니라
사라졌을 때 나타남.
집착을 덜어내서 평을 잡아야.
[반론] 타인의 부분이 무거워졌을 때 분동을 덜어내면
평상이 무너지는 방향으로 더 기울어지는 것 아닌가?
평형을 맞추려면 분동을 더 올려야 하는데
분동을 집착으로 이해하면 
집착을 더 많이 해야하는 방향이 아닌가?
결국 분동을 덜어내는 방향,
즉, 집착이 줄어들기 위해선
외적 요인에 의한 무게를 줄이는 방향이 순리가 아닐까?
그래서 수도자는 이 길을 선택하는 것 아닐까?
차라리 분동을 집착이 아니라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일종의 내공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

무사시일 때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백척간두와 매달린 절벽이 분동과 같은 집착일 수.
저울 반대편에 큰 무게의 무언가가 있다면
당신은 균형을 잡을 수 있는가?
평상심이 도다 == 부처의 마음.
평상시에 신경 안 쓰던 것을 의식하게 되면 더 실수.
의식을 하면 평상시가 깨진다.
명경지수 :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 

사념이 전혀 없는 깨끗한 마음.
청동거울은 계속 닦아야 하고 

물은 고요해야 나를 비춰볼 수 있다.
물은 억지로 눌러서가 아닌, 내버려둬야 고요해짐.
마음은 내가 완벽하게 자유로울 때
가장 자연스레 반응
자비, 사랑 등 소중한 가치는 모두 자유에 기반해야.
자유롭다는 것은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길.
부처의 마음은 노력이 아닌 자유에서 오는 것.
부처가 되는 것이 강요되어선 안됨.
악기를 콩쿨에서 연주하는 것과 
집에서 편히 연주하는 것은 다름.
관객이 없는 듯 집에서 편히 하는 연주가 가장 평상.
혼자 있을 때 천 명의 사람과 함께 있는 것처럼 행동,
천 명의 사람 앞에 있어도 혼자 있는 것처럼 행동.
보통 깨닫지 못한 사람은 혼자 있을 때는 편하고
여러 사람과 같이 있으면 평상심이 깨져 불편.
무거운 의미를 가진 평상.


분동을 집착이라고 표현하셨는데
나는 이를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나만의 무기 내지 내공으로 이해하고 싶다.
한국 양궁 선수들의 훈련과 같이
어떠한 환경에서도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각자의 분동에 맞게 
분수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분동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속세와의 인연을 거의 끊고
공의 상태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고
항상 분주한 가운데에 최적화되어 있는 사람들은
항상 무거운 분동을 지니가 살아가기에
갑자기 공의 상태에 이르면 평상심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나는 전자에 가까운 기질을 타고났으므로
억지로 후자에 가깝도록 노력할 필요는 없고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분동이 갖추어질 수록
그에 따라 맞춰 살려고 한다.
또한, 억지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려는 
노력 역시 안할 것이다.
타고난 기질 내지 그 동안 아로새겨진
마음이 선한 것과 거리가 먼데
어찌 억지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이 또한, 자연스레 생겨나길 바랄 뿐이다.

 

[2025.4.19]

어른김장하에서 뵐 수 있는

김장하 선생님의 이타심은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길러진 것인가?

난 전자에 가깝다고 본다.

갖가지 천재성이 타고나듯

인성의 천재성도 타고난다고 본다.

물론, 후천적 요인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그러나, 선천적 요인 없이

생불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ApkJdVvZZ9s

 

 

https://www.youtube.com/watch?v=3zyvWal9RO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