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만교가 정통인 인도에서 불교는 외도.
화두는 어떤 사람을 딜레마에 빠뜨려
논리/언어로 탈출 불가,
언어에서 자유로워야 탈출.
불교에서 선문답/화두가 나오는 이유 :
언어가 모든 집착의 기원이므로.
'나'라는 단어는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짐.
물과 같이 흘러 지나가 없어지는게 우리네 인생,
'50대의 나' != '60대의 나'.
'나'는 계속 변해서 같지 않음.
'나'라는 집착으로 인해 영원불멸의 자아가 있다는 착각.
흐르지 않는 물과 불멸의 내가 있을 것이란 착각.
인도 전통 철학에서는 아트만(atman)이 있다고 생각.
죽은 후의 보상이나 벌을 위해 만들어진 '영혼'.
사찰에서 저승의 유명계를 상징하는 명부전.
주어에 집착하면 언어의 착각에 빠짐.
현명한 사람은 '지금'에 집중.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네덜란드 출신
합리주의 철학자), 실체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데카르트 이원론에 반대하여 일원론 주장,
기독교로부터 파문당한 범신론자,
'자유로운 인간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삶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불교와 비슷한 스피노자/니체/비트겐슈타인,
'지금이 중요, 지혜로운 사람들은 여기를 본다'.
32칙 외도문불(불교도가 아닌 사람이 세존에게 묻다)
외도가 세존에게 물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묻지 않으렵니다."
세존은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감탄하며 말했다.
"세존께서는 커다란 자비를 내려 주셔서
미혹의 구름에서 저를 꺼내
깨닫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를 표하고 떠났다.
아난이 곧 세존에게 묻기를,
"저 사람은 무엇을 깨달았기에
감탄하고 떠났습니까?"
그러자 세존은 말했다.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좋은 말과 같은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화두를 던진 외도.
싯타르타의 침묵(14무기) :
"세계는 영원한가 무한한가?",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다른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등
형이상학적 질문에 침묵.
영혼 내지 아트만(불변정신)이란게 없단 생각,
즉, 관련 주어가 없는데 어떻게 답을 하나?
'네모난 원' : 이 자체가 없는 것.
질문의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침묵한 싯타르타.
집착을 낳고 영원불변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관한 질문에 침묵.
비가 안 온다고 하는 것 == 맑은 날을 못 보는 것,
비가 오지 않는데 비를 실체화하면 안됨.
희론 : 자의식에 기반을 두어 일상적 지각의 확산, 망상.
언어도단(!= 말도 안됨) : 언어에 대한 집착이 끊김.
논리의 세계에서는 'yes', 'no'가 존재.
현실에서는 낮, 밤이 완벽히 구분되지 않음.
논리적으로는 맞는 외도의 질문.
논리적인 사람은 언어에 집착하는 사람.
대답할 수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믿지 않겠다는 외도.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깨고 떠난 외도는
정말 깨달은 것일까?
이 화두의 핵심 문구 :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좋은 말과 같은 사람이다."
채찍 그림자만 봐도 달리는 말은 자유로운 말일까?,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야
그 서있는 곳이 모두 참된 곳)과 상반되는 모습.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내가 있는 곳이 참으로 보이지 않음.
채찍만 들어도 움직이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아님.
좋은말(양마) : 길들여진 말.
야생마는 뛰고 싶을 때 뛰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춤.
주어에 집착하는 순간 논리적으로
내릴 수 있는 답은 '있다', '없다' 두 가지.
외도는 깨닫기 보다 웃기는 자라고 한 세존.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뜀 : 알아서 복종, 자발적 복종.
처음 이 화두를 접했을 때
내 학창시절의 경험에 의지하여 엉뚱하게 풀었다.
공부하다 뭔가 막히는 게 있었는데
선생께 가던 길 내지
막상 선생께 질문하는 순간,
막히던게 스스로 풀렸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외도란 사람도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민이 있어 찾아갔다가
세존에서 풍겨나오는
언어보다 높은 차원의 좋은 기운에 의지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떠났고
세존은 그러한 외도에 대해
아주 조그마한 힌트로도
스스로 깨닫고 간 것이라 말했다고 생각했다.
한 차원 높게 생각할 수 있었다면
강신주 선생님과 같은 해석을
단 번에 할 수 있었을텐데
아직도 주인 의식이 부족한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약간의 타협으로 쉽게 갈 수 있는 길인데
괜한 주인의식에 사로 잡혀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즉, 마음으로는 전혀 존경하지 않으나
마상을 입지 않고도
미소를 머금고 인사를 할 수 있어 인사한다면
스스로 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이 되지 않겠단 집착에 사로잡혀
괜한 고자세를 취해서 타인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필요는 없다.
젊어서는 나보다 한살이라도 어린 사람에겐
먼저 인사하지 않겠단 꼰대스런 고집이 있었는데
어느덧 50이 넘어 어느 정도 뒷배가 생겨
언제 잘려도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어
스스로 자존감이 높아지니
나보다 한참 어린 사람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인사할 수 있는 수준에 올랐다.
그리고, 높은 임원을 보더라도 쫄지 않고
인사를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입에 풀칠하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어 억지로 잘보이려는 모습이나
이상한 고집에 사로잡혀
억지로 주인 행세하려는 모습 모두
참된 주인으로서의 행태가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야생마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게 중요하지만
늘 야생마처럼 사는 것 역시 고단한 삶일 수 있으므로
장자에서의 지리소 이야기의 교훈처럼
길들여진 말과 야생마를 오고가는 삶이
적절한 타협점일 수 있다.
즉, 길들여진 말이 입을 수 있는 혜택은 최대로 얻되
야생마처럼 살 수 있는 시간을
가능한 많이 확보하느냐가 중요해 보인다.
저항할 수 있는 힘 내지 저항으로 인한
피해가 최소인 상태라면
내 맘대로 행동할 수 있으니 주인에 가깝겠으나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하고
저항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하다면
자칫 이상한 주인 행세는 순리가 아닐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75egUKvcDI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신주 무문관 : 주인공으로 살기 [45강] (1) | 2024.12.22 |
---|---|
강신주 무문관 : 주인공으로 살기 [44강] (0) | 2024.12.22 |
강신주 무문관 : 주인공으로 살기 [42강] (2) | 2024.12.15 |
강신주 무문관 : 주인공으로 살기 [41강] (3) | 2024.12.14 |
강신주 무문관 : 주인공으로 살기 [40강] (3) | 2024.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