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강신주 장자수업 [35강. 날개이야기 : 목숨을 건 도약(Salto Mortale)]

dirigent21 2024. 3. 13. 12:16

-인간세

흔적을 끊기는 쉽지만,

땅을 밟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네.

인위적인 것(사회 통념)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은 속이기 쉽지만,

자연적인 것(자신이 원하는 것)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은 속이기 어렵지.

날개 있는 것이 난다는 것은 들어봤겠지만

날개 없이 난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했을거네.

앎으로 안다는 것은 들어봤겠지만

알지 못함으로 안다는 것도

듣지 못했을거네.

저 텅 빈 곳을 보게!

빈방에서 밝음이 생기고(생백),

상서로움은 고요함에 머물고 있네.

저 고요하지 않은 상태,

앉아서 달린다고 말하지.

이목을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에서 앎을 쫓아낸다면,

귀신도 찾아와 깃들텐데

하물며 사람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지배/복종의 관계 <->

사랑/자유의 관계(모든 인간에게 통용되어야).

자유와 사랑의 길이란 번지점프대로부터 뛰는 것.

쇠렌 키르케고르(Kierkegaard,

헤겔 반대편의 덴마크 실존주의 선구자),

신은 그냥 믿는 대상으로서

이성의 힘으로는 신을 사랑할 수 없음,

살토 모르탈레적.

헤겔의 꿈 :

이성의 힘으로 절대정신(성서상의 신)에 이름,

변증법적으로 언젠가는 신의 나라가 되는 것.

살토 모르탈레를 타자에 적용 :

타자를 알아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서 아는 것, 장자적.

번지점프 뛰기로 작정하거나

뒤로 물러나기로 작정하면 불안하지 않음.

그러나, 뛰기도 안 뛰기도

애매할 때(자유로울 때) 불안.

더 이상 알고싶지 않을 때 끝나는 사랑.

흔적을 끊는 것 :

이쪽 절벽에서 저쪽 절벽으로 뛰기로 작정,

지배/복종의 세계에서 자유/사랑의 세계로 뛰는 것.

익숙한 사람들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내 삶을 던질 때

그 곳의 땅을 밟고 걸어야.

사랑 :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알게 되는 것.

철학(Philosophy, 애지학) :

Philos(사랑) + Sophia(지혜),

철(지혜로움)자지야,

지혜에 대한 사랑, 앎에 대한 사랑?

아니, 사랑해서 아는 것.

첫번째 길 : 지혜로운 걸 알지만

그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길.

두번째 길 : 그 대상이 무엇이든

사랑해서 알게 되는 길.

이사갈 때 빈집을 보고 깨닫는 것 :

살던 집이 의외로 넓다는 사실.

날개 없음, 알지 못함의 긍정적인 측면.

가장 가벼워지는 방법 : 날개마저 비워내는 것.

기득권, 오만, 재산을

그대로 끌고 와서 살려고 하면

이쪽으로 못 건너온다.

좁고 갑갑했던 이유는

짐 때문에 빛이 막혔던 것.

물건을 빼고 먼지가 가라앉으면

햇빛을 받아 정갈한 느낌.

비었기 때문에 들어오는 사람들,

무언가 들어올 가능성이 있는 빈집이지만

안 들어올 수도 있는 것.

도행지이성과 연관된 날개이야기,

행(길이 없는 데서 걷는 것) == 날개없이 나는 것.

수십년간의 습관, 규칙 모조리 비워내야

간신히 뛸 수 있는 가벼움을 얻지만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음,

성공한다면 비워내었기 때문.

사랑의 관계와 삶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장자.


 

성경을 보면 부활한 예수의 못자국을

직접 확인하는 도마를 향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라고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성경을 이리재고 저리재면

결코 온전히 믿지 못할 것이므로

믿음은 기본적으로 맹목성을 필요로 한다.

물론, 믿음마저도 선물이란 단어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기도 하지만.

그러므로 성경 저자는 이런 방면으론

머리가 비상한 사람임에 틀림 없다.

맹목성이 없으면 믿음이 부족한 자로서

믿음이 없으면 선물을 못받은 자로서

가스라이팅을 하는

교묘한 설계가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어쨋든, 성경에 따르면

온전한 믿음으로 온몸을 던져야

천국으로 갈 수 있는데

불행히도 교회 나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온몸을 던지지도 못하고

미지근한 상태에서

시간, 물질 낭비를 하는 가운데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이란

희망회로를 불타게 돌리고 있으니

성경 작가들에 의해 잘 놀아나고 있는 셈이다.

그 가운데 아주아주 극소수만

예수의 제자도를 따라서

이 세상을 비추고 썩은 곳에 소금을 뿌리니

미약하게나마 종교의 순기능이 작용하긴 하지만.

물론, 성셩 속 이야기 중

이스라엘 역사를 제외하고선

99.99999% 허구의 이야기겠지만

뭔가를 알아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사람과

맹목적으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인생에 있어 어느 것이

옳은지에 대해 정답은 없다.

다만, 어느 길을 가든

성공의 확률은 매우 매우 낮다는 사실이다.

이리재고 저리 재는 사람 가운데

극소수의 뛰어난 사람이

세상을 바꿀만한 것을

발견하거나 만들어 낼 것이고

나머지는 그저그런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반면, 온몸을 던지는 사람 가운데도

이 세상을 바꿀 뛰어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반면,

본인은 영성으로 불타오르지만

호구 내지 광신도가 되어

본인은 물론, 그 주변까지

불구덩이로 초토화시킬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저 나같은 소시민은 온 몸을 던질

용기 내지 준비는 안되어 있으니

안전 장치가 있는 상태에서

생각이라도 온전히 던질 대상을 찾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