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강신주 장자수업 [25강. 총명 이야기]

dirigent21 2024. 3. 10. 23:11

총(귀가밝음)명(눈이밝음).

장자 철학 :

동아시아의 사유를 계속 흐르게 하는 샘물

지식인 대상이 아닌 책,

민중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장자.

48가지 이야기 중

3가지만 마음에 남아도 장자 학파의 일원.

불교의 핵심 개념 :

에히(Ehi, 여기[싯타르타의 자리]로 와서)파시코( Pasiko, 봐라),

제자에게 외우라고 하는 대신

옆에서 같이 봐주는 불교.

인생무상을 외우라고 하는 대신,

꽃이 지는 것을 직접 와서 보고

세상의 무상함을 보라고 함.

말로만 아는 것을 넘어 내 삶에 적용할 수 있나?

불교에서 자비가 나오는 것 : 영원하지 않기에.

성장 과정에서 경쟁하며 변하는 아이,

돈을 벌려면 의대에 가야지->훌륭한 아이다!

나처럼 돈에 연연하는구나!,

하지만 중요한 건 묻지 않는 어른들.

장자 : 에히파시코? 아니 그냥 파시코!,

오지말고 그 자리에서 그냥 봐라,

그런데 굳이 오면 같이 있어 줌.

불교와 장자의 유사점 : '보는 것'을 강조.

불교와 장자의 차이점 : 와라 vs. 오지마.

-변무

내가 누군가 '귀가 밝다'고 말한 것은

'저것의 소리를 듣는다'라기보다

그가 '스스로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누군가 '눈이 밝다'고 말한 것은

'저것의 모양을 본다'라기보다

그가 '스스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릇 스스로 보지 않고 저것을 보는 경우나

스스로 얻지 않고 저것을 얻는 경우는

다른 사람이 얻으려는 것을 얻음이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음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맞다고 하는 것에 맞추려 함이지

자신이 맞추어야 할 것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눈이 밝다는 것과 시력이 좋은 것은 다른 개념.

스스로 보고 스스로 듣는 것이 중요,

많은 인문학자들의 공통 주제.

말테의 수기(1910년도 릴케의 대표 소설),

주인공이 시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수기로 쓴 작품,

20살의 릴케, "나는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스스로 본 적이 없다는 깨달음.

릴케가 쓴 시에 괴테의 느낌 : 스스로 본 것이 아니기에.

인문학의 선언 : 나는 나의 눈으로 봐야 한다,

자기 눈으로 봐야 시가 나온다.

똑똑하다는 것 : 학자들의 눈으로 보는 것.

'붓다'(깨우친 사람) : 자기 눈으로 세계를 보는 자.

깨우침의 핵심 :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가!

나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

불교와 인문학의 공통점 :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

내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면

가르침을 받을 이유가 사라진다.

싯타르타 : 보는 법을 가르치겠다,

그런데 내가 보는 것을 남이 가르친다고?

눈뜰까지 옆에서 봐줄 수 있을뿐.

에히파시코 : 네가 제대로 보는지 안보는지

내가 지켜주다가 네 눈으로 볼 수 있게되면 떠나라.

맹(눈멀 맹, 눈이 없다)농(귀먹을 농, 용의 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파충류) : 충명의 반대.

눈과 귀에만 맹과 농이 있는가?

우리의 앎에도 맹과 농이 있다.

패션 감각은 나 자신이 아닌 자본이 원하는 감각,

끝내 남을 만족시키는 것들만 보고 있다.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집회할 때

교통 상황을 보라고 하는 국가.

보수적 시선 : 이혼율 증가에 주목.

인문학적 시선 : 재혼율 증가에 주목, 사실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을 선정할 때 해석은 이미 들어가는 것,

체제가 강조하는 사실 : 나대지 말라.

인문주의자라면 인간의 자유,

사랑을 증진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각박한 사람들의 소리를 담은 사실도 보여줘야.

'이것이 사실이다'라고 얘기했을 때

중요한 것은 보라고 한 주체.

국가가 보라고 하는 것을 그대로 보면

이기적인 불만들이 용인되는 분위기.

내가 억울할 때 나도 저 자리에 갈 수 있으니

우리는 서로 보호해야 해라고 되어야.

다양한 가치가 들어가 있는 광고,

광고를 통해 각인되는 긍정적인 이미지.

정말 우리 스스로 보고 있는게 맞는가?

누군가와 헤어지려면

헤어질만한 사실만 보면 된다,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인간의 특징.

내게 힘이 되고 자유로워지는 사실이 있으니

우리 삶의 자유와 사랑을 증진하는 사실을 봐야.

우리 사회의 모습 :

우리가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다름.

더 힘든 사람도 잘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자 :

그 순간은 힘들어도 지나가면 별거 아닌 것.

국가입장에서 우리가 보지 않길 바라는

사실을 잡아내는 장자의 이야기.

나를 부정하는 것들을 보도록 하는 것을 보지 말아야.

우리 주변에는 보도록 강요하는 것이 많다,

우리가 이렇게 봐야 편한

외부의 시선들, 부모, 국가, 사회의 시선.

타자의 시선을 지우고 내가 뚜렷하게 봐야.

봐야 하는 것 : 나의 행복과 자유를 늘어나게 하는 것.

자신의 눈이 아닌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보는 현대인.

불교의 입장, 장자의 입장 어느 것이 옳은가?

답은 각자의 몫.


 

자신의 눈으로 봐야하는 것은

웬만한 합리적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매 순간 이게 정말 나만의 생각으로

보고 듣고 이해하는게 맞는가 아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은

똑똑해보이거나 똑똑한체 하지만

어쩌면 동식물만도 못한 존재로서

생각보다 대단히 멍청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깨달음과 어설픈 지혜만 있음에도

나만의 생각으로 보겠다고 결심하면

별 이상한 빌런 내지 또라이가 나오면서

이 사회를 어지럽혀

오히려 스스로 보고 듣지 못하는 것보다

나쁘게 될 수 있다.

이게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딜레마이다.

어찌어찌해서 나만의 시선으로 깨달아

아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아는가?

이 세상과 주변 인간들이 미쳐보이거나

미개해 보이면서 정이 뚝 떨어지고

음악의 경우, 들어서 즐길만한

가수와 연주가 확 줄어들게 된다.

막귀 시절엔 정말 잘하게 들리던

그 가수 내지 단체의 연주가

귀가 열리게 되면 음이탈 내지 잡소리가 들리며

들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단순히 스스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고

오히려 스스로 보고 들을 수 없는 사람보다

불행해질 수 있다.

성경 구절 가운데 차갑든지 뜨겁든지 해야지

미지근하지 말라는 게 있는데

이게 바로 애매한 상태라 할 수 있다.

물론, 성경에선 믿음이 뜨겁든지

차갑든지 하라는 말이지만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는 논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보고 듣는게

더 불행해질 수 있으니

그냥 누군가 보라고 하는대로 보고

들으라고 하는대로 들어야할까?

이건 선택의 몫이다.

즉, 누군가 보고 들으라고 하는대로 하는게

아무 불편이 없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런데, 그런 것에 매우 민감해서

그렇게 살지는 못하겠다면?

그렇다면 용기 있게 길을 나서야 한다!

그러면, 어느 단계까지 가야할까?

스스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가운데

그럴 수 없는 환경에서조차

나만의 편안함에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음악을 예로 들어 보자.

베토벤 장엄미사란 곡이 있는데

베토벤 스스로 자신의 최고의 걸작이라고 했고

기념비적인 곡인만큼

수많은 지휘자와 연주 단체들이 연주를 해왔을 것이다.

그런데, 지휘자도 완벽한 인간일 수 없어

이상한 해석으로 연주하거나

훌륭한 지휘자라도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다른 방향으로 잘못 연주될 수도 있으며

연주자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므로

하나도 틀리지 않고 연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한계를 이해하고 다양하게

하나하나 찾아서 들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찾아 듣다보면

어떤 부분은 이 지휘자와 단체의 해석과 연주가 훌륭하고

또 어떤 부분은 저 지휘자와 단체의 해석과 연주가 훌륭하다.

이걸 종합해서 내 머릿속으로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으로

상상속으로 연주해보다보면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정말 뛰어난 하나의 지휘자와 단체는

내가 원하는 이상향 그대로 연주하는 걸 찾을 수 있게 되는데

이땐 더할 숨겨진 보배를 찾은 것과 같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반가우며 기쁘다.

삶도 마찬가지라 본다.

선입견을 내려놓고

여러 군데를 가보고 경험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나와 결이 맞는 곳이 분명히 나올 것이니

거기 정착해서 살아가고 맞지 않는 것이 명확하면

때가 오기를 묵묵히 기다리면서

소모적인 논쟁이나 싸움을 하지말고 준비하다가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당장 떠나면 된다.

스스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걸 뿌듯하면서

날을 세워 비판만 해대는 가운데

정작 자신의 삶 내지 세상을 바꿀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가장 한심한 것이고

나 역시 그런 부류였다.

다행히 미숙한 단계를 넘어갈만한 방법을

느릿느릿하게 찾아가려고

걸음마를 떼었으니

삶이 조금씩 나아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