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사람들이 어려운 용어로 논쟁하는 모습에 대한 조롱
-제물론
너와 내가 논변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너를 이기지 못했다면,
네가 옳고 나는 그른 것인가?
반대로 내가 너를 이기고
네가 나를 이기지 못했다면,
내가 옳고 너는 그른 것인가?
아니면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옳고
나머지 하나는 그른 것인가?
아니면 너와 나 모두 옳거나
모두 그른 것인가?
나와 네가 살펴 알 수 없다면,
다른 제3자도 깜깜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불러
옳고 그름을 판정하도록 해야 할까?
너와 의견이 같은 사람?
이미 너와 의견이 같은데
어떻게 그가 판정하겠는가?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
이미 나와 의견이 같은데
어떻게 그가 판정하겠는가?
나나 너와 의견이 다른 사람?
이미 나나 너와 의견이 다른데
어떻게 그가 판정하겠는가?
나나 너와 의견이 같은 사람?
이미 나나 너와 의견이 같은데
어떻게 그가 판정하겠는가?
그렇다면 나나 너나 제3자가
모두 살펴 알 수 없으니
다른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논변 습관에 따라 누군가 얘기할 때
내가 말할 걸 생각해서는 안됨.
지적인 논의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논변.
명백히 옳으면 굳이 논쟁할 필요가 없음.
가장 빨리 이기는 법 :
상대가 대응하기 전에 화제 바꾸기.
직업적으로 말발이 센 사람은
교육기관이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제자백가 중 제일 영민한 사람?
장자처럼 인간적이진 않지만
가장 기술적이고 논리적이었던 한비자,
다른 제자백가와는 달리
주석서가 필요없는 한비자의 글,
그러나 인문 정신은 없이
똑똑하기만 했던 한비자.
한비자의 관심사 :
어떻게 하면 국가가 이득을 더 얻을까?
그러나, 한비자의 치명적인 단점 : 말 더듬이.
순자의 제자 중 이사 : 머리는 나쁘지만 말발이 좋았음.
이사의 간교로 한비자에게 짐독을 보내 죽인 진시황.
지적 능력 : 먹고살기 위해 약자가 가져야할 힘.
힘이 있으면 멍청해도 되지만
힘이 없는데 멍청하기까지 하면 살아남기 어려움.
권력자 앞에서의 논쟁에 옳고
그름은 없고 자리 유지 여부만 있는 것.
여론 형성 : 제3자가 봤을 때 누가 이겼느냐!
사랑의 놀라운 점 : 주고받기의 논리가 아니라
받은 사랑을 갚을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것.
이해 관계를 따지는 사랑 :
합리적인 것이 아닌, 외로움을 자처하는 것.
안들어가면 좋지만
불가피하게 들어갈 때가 있는 논변의 세계.
발톱은 가지고 있되 쓰지 말아야하지만
꼭 써야하면 단호하고 강력하게 써야.
한자 변(가운데 칼 도 -> 말 언) :
칼 == 말, 가슴을 잔혹하게 찌를 수 있는 말.
말의 특징 : 찔린 사람은 기억하는데
찌른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논변에서의 승리 :
상대방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말로 찌르는데 성공.
상대방의 말로 만신창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상대방을 만신창이로 만들것인가?
철학이 오용되는 대표 사례인 자유 의지 여부,
자유롭게 저지른 범죄 vs.
자유롭지 않은 상태(정신병 등)에서 저지른 범죄,
범죄자의 딜레마 :
자유의지를 인정해주는 검사 vs.
나를 환자라고 하는 변호사.
사람들이 특히 잔혹해지는 시기 :
사회적 억압이 심할 때,
사회적 억압이 없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 일.
체제의 입장 : 그 한 사람만 없어지면 범죄가 없어질 것.
서양 근대철학의 입장 : 자유 의지가 있다,
그런데 과연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칸트 철학의 한계 : 법정에서만 쓰임,
법정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논의.
상지(살펴 앎) :
상(볼 상, 그늘에서 노예들을 감시),
재상(왕 대신 감시하는 사람).
논쟁의 이유 : 살펴 알 수 없기 때문,
검사나 변호사 모두 인간의 자유를 살펴 알 수 없음.
명확하면 논쟁을 안함,
확인할 수 없는 영역에서 논쟁은 벌어짐.
그러나, 법정에서 자유에 대해 논쟁하면
제3자는 헷갈릴 수 밖에.
원자의 크기가 쌓이면
천리의 두께가 된다고 주장한 혜시.
나무토막을 계속 쪼갤 수 있다 vs.
쪼개다 보면 더 안 쪼개진다(원자론, 혜시) 논쟁,
그러나 주장하는 사람들은 본 적 없는 논제.
사후세계와 영혼에 관한 논변도 마찬가지,
그럼에도 논변이 치열한 건 우리 삶을 결정하기 때문.
인간의 자유가 완전히 부정되면 함께 부정되는 책임,
인간을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책임을 묻기 위해.
책임을 위해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는 근대 사법 체계.
장자의 입장 :
가장 좋은 것은 논변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는 것.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한다고 떠드는 괴리들,
살펴 알 수 없는 영역에 연연하지 말 것.
사람엔 크게 세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Giver, Give&Taker, Taker가 있는데
확률적으로 Giver가 가장 성공한다고 한다.
Giver가 Taker로부터 손해를 볼 수도 있지만
대체로 Giver+Give&Taker수 > Taker수이기 때문에
결국은 Giver가 더 많이 돌려받는다는 논리다.
물론, 그 Taker가 부동산 사기꾼 내지 유괴범이어서
한 방에 털어가는 자라면 틀린 논리겠지만.
나는 대체로 돈계산에 능한 편이고
철저한 Give&Taker인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Giver가 되고
그렇더라도 심재를 통해
마상을 받지 않을 수준이 되었으면 한다.
사람은 생각보다 비이성적이며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지 못한다.
물론,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누군가 재수 없는 행동을 할 때
유머 감각이 있거나 잘 살랑대서
여론 형성을 잘하는 사람은
그것마저도 엉뚱하고 재미있다고 하고
힘있는을 사람 앞에선 꼼짝도 못한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사람이
어쩌다 실수로 똑같은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거나
왕따를 넘어 괴롭힘을 가하기도 한다.
언젠가 TV에서 백인계가 길을 물으면
최선을 다해 공손하게 가르쳐주는 반면,
아랍계가 길을 물으면
대부분 피하거나 공손하지 않은 반응을 본 적 있다.
어느 집단에서 인기투표를 하면
예리한 내 눈에 보기엔
대체로 발톱을 숨긴 빌런이 틀림없는데
가장 인기 있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경우를
간혹 경험했다.
학폭을 주도하는 자도
빌런 중의 빌런이 아니겠는가.
물론, 인성이 좋고 너그러워
인기가 높은 경우도 있는데
그 경우엔 그 모임의 구성원이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말주변이 없는 나는
말보다 글이 훨씬 편한 편이다.
글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있고
고칠 기회가 있는 반면,
말은 반응속도 및 임기응변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변 재주가 없는 나는 논변을 잘 안하고
정말 열받으면 그냥 버럭 화만 내는데
이것 때문에 남들의 오해를 사기도 한다.
대통령 선거나 시장 선거 전에
후보자 TV토론이란 것을 한다.
토론을 잘 못하더라도
당선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데
당선 여부를 좌우하는 것은
토론을 잘하냐도 있겠으나
금권이 선택한 후보자가 누구냐도 중요하다.
말꼬투리 하나 잡아서 10배 100배 증폭시키고
심지어 가짜뉴스를 양산하는 것은
그 배후에 금권을 등에 업은
언론 세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엔 찌질이 중의 찌질이였을지 모르나
어쩌다 사법 고시에 합격하고
검사가 되어 맘껏 칼춤을 출 수 있는 자들이
금권을 등에 업고 감히 공정을 거론하고 있다.
논변의 들어가지 않았다면 비록 비루할지언정
삶을 마감하지 않을 수 있었던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따라서, 논변에 아무 의미가 없음을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성경에도 보면 논쟁을 피하라는 말이 있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교리 논쟁에 의해
얼마나 무고한 피가
차고 넘치게 흘렀는지와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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