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도올주역강해 [9강]

dirigent21 2024. 4. 24. 10:28

영화 엘비스.
태극 : 우주, 음양의 조화를 관장하는 신, limit + limitless.
책, 노자가 옳았다.

주희 -> 주렴계 태극도설, 무극이태극,
끊임 없는 조선조의 유교 논쟁.
유교 논쟁을 끝내는데 기독교, 동학이 이겨.

이기론 : 리(주어), 기(술어).
기독교 : 하나님(주어)이 세상을 운행한다(술어).
서양은 주어가 있어야 하나,
동양은 주어가 없어도 된다.
서양의 실체론은 주어병적 망상.
주희는 서양적 주체론을 가졌음.
최재우의 결론 : 신은 존재하지 않음.
주어병에서 해방되어야 신을 부정할 수 있음.



쇼펜하우어의 "소품과 부록"에서
종교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기술한다.
거기에 있는 문장들을 인용함으로써
서양 세계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낚여 그토록 오랫동안 
주어병에 걸렸고 지금도 걸리고 있는지
느껴보았으면 한다.
반대로, 한국에선
"주어가 없다"란 명언을 통해
주어병의 반대를 기막히게 이용함으로써
기가 막히게 면죄부를 주어
이후 대통령으로서 
온 나라를 수익모델화하게 되었다.
그 자가 대통령이 된 직후, 광우병 파동으로 
온 나라가 촛불로 떠들썩했었는데
그 사건을 두고 온 나라가 좌파들에게 
선동되어 낚였다라고 
뭣모르고 떠벌이고 다니는 자들을
온라인상에서 종종 보게 된다.
만약, 그 때 촛불로 막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맘놓고 미국산 소를 먹지 못했을 것이다.
신선한 소가 아닌 병든 소, 늙은 소의
고기들이 섞여서 마구마구 들어왔을테니 말이다.

"원죄로 인해 영겁의 벌을 받게 된
 인류 가운데 극소수만이 구원받고
 나머지 대다수는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
 여호와는 죄에 예속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류를 무로부터 불러내
 영원한 고통에 처하게 했다.
 다시 말해 신은 어떤 존재를 무에서 창조해
 그 존재에게 온갖 금지와 명령을 내리고
 지키지 않는 인간들에게 온갖 고통을 가하며
 영원히 인간을 괴롭힌다.
 관용과 죄의 용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한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 상태(영벌)에 빠진다.
 모든 것이 이루어진 후(성경에서 '다 이루었다'),
 최후의 심판(요한계시록에 기술된)에서
 이루어지는 처벌은 개선도 위협도 아닌
 단순한 복수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든 인류는 구원받을 수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영원한 고통과 벌을
 받도록 창조된 것이 확실하고 분명하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가스펠이 교회에서 흔히들 불리우는 것과
   대조적으로)
 교리의 비합리성을 개선하기 위해
 6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연옥설을 정립하는데 불교의 윤회에 대응한다.
 (하지만, 연옥설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헌금을 갈취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면 
  영화 '신과 함께'와 비슷한 느낌이 절로 들 것이다)
 기독교의 또 다른 근본적 오류는
 인간을 자연에 반하는 방식으로
 동물계로부터 떼어 냈다는 것이다.
 반면, 브라만과 불교는 인간을 동물계와
 밀접하게 연결 지어 서술한다.
 창세기를 보면 동물 전체를 마치 사물처럼
 인간에게 넘기고 아담을 최초의 동물학 교수로
 임명하여 동물의 이름을 짓게 한다.
 (이후 상당히 긴 글을 통해
  당대 유럽에서 자행되던
  동물학대의 구체적 사례를 들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철도의 가장 큰 선행은 수백만 마리의 말들이
 비참하게 살지 않게 해준 점이다.
 동물은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과 
 완전히 같은 존재이고 단순의 지성의 정도
 즉, 뇌의 활동에 있을 뿐이다.
 나무, 돌맹이, 금속으로 우상을 만들든
 추상적 개념을 조합해 만들든 매한가지다.
 (나도 최근 이렇게 생각해왔는데
  동일한 생각을 하는 철학자가 있어 무척 반가웠다)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하게 하는 존재,
 소리치며 부르는 존재,
 감사하는 어떤 개인적 존재를
 자기 앞에 가지자마자 그것은
 우상 숭배가 된다.
 희생양을 바치든 애착을 바치든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즉, 모든 의식이나 기도는 당연히
 우상숭배의 증거가 된다.
 (크리스찬들이 흔히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를 인도하셨다라고들 쉽게들 얘기하는데
  그게 자신의 무의식이 말을 건 것인지
  아니면, 진짜 성령이 말을 건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어디선가 먼 우주로부터
  잡히지 않는 전파를 쏴서
  (혹은, 전우치의 마법과 같이
   수십억의 투명망토를 입은 신의 복사본)
  그 전파를 수신하는 
  초능력을 가져서 들리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행태는
  눈에 보이는 사물로서의 우상이 아닌,
  일종의 가상 우상을 섬긴다는 점이다)
 (이후, 슈피겔의 '페르시아 종교에 대하여'
 를 인용하며  유대교(구약)에는 
 조로아스터교의 변형이라고 기술한다)
 즉, 여호와는 아후라 마즈다,
 사탄은 아흐리만의 변형.
 바빌론 유수를 통해 페르시아 제국으로 끌려간
 유태인들이 키루스(고레스)황제의 자비를 얻어
 고국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에스겔서에는 마치 SF 영화와 같이 생생한
 여호와의 모습이 기술되어 있는데
 여호와가 타고 있던 생명체(황소+사자+인간)는
 페르세폴리스 내지 시리아 조각에서도 발견된다.
 반면, 신약은 인도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한데
 인도적 윤리, 염세주의, 아바타(신의 화신)가
 그 증거이다.
 (신약성경에서 물위를 걷는 예수를 보고
  베드로가 따라하다 믿음이 부족해
  물에 빠지는 모습이 나오는데
  예전에 "반야심경 마음공부"란 책을 읽으면서
  거의 동일한 불교 버전의 사리푸트라 이야기가 
  있는 걸 알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불교 버전이 훨씬 먼저 지어졌다)
 이를 토대로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과
 내용적으로 결정적인 모순 관계에 있고
 원죄 이야기만 연결고리 역할을 할 뿐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순관계를 극복하고자
 무에서 나온 창조주는 구세주와 동일시되고
 더 나아가 일류와 동일시되었다.
 아담의 원죄로 타락한 인류는 
 죄에 구속되어 영원한 파멸이 예정되었으나
 구세주로서 인류의 대변자 역할까지 맡게 된다.
 보복 대신 원수를 사랑하는 계율,
 수많은 후손 대신 영생의 약속,
 조상의 죄를 삼사대에 이르게 하는 대신
 모든 죄를 무색하게 하는 성령이 대신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아름답다"라고 한 
 유대의 낙관주의는
 사단을 "이 세상의 군주"로 임명함으로써
 염세주의화되어 
 이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 되어 버렸고
 영원한 기쁨의 나라는 
 이 세상과 죽음의 저편에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체념과 죽음 저편 세상에 대한
 희망이 기독교의 정신이다.
 인도의 지혜의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신약 성경에 반해
 구약 성경에선 원죄만이 인도의 지혜에 맞는다.
 기독교를 철저히 이해하기 위해선
 산스크리트리어를 알아야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철저히 이해하듯
 세상을 부정하는 다른 두 종교인
 브라만교와 불교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다.
 기독교가 인도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이집트로의 도주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온갖 추측을 해 본다면,
 예수가 인도 종교를 기원으로 한 
 이집트 사제에 의해 교육받아
 이들에 의해 인도의 윤리와 아바타의 개념을 받아들여
 이 후, 본국에서 유대의 교의에 맞추고 옛 근간에
 접목하려 애썼으리라 가정할 수 있다.
 나아가 도덕적이고 지적인 우얼감에 도취해
 마침내 자기 자신을 아바타로 간주하여
 자신을 '인자(인간의 아들)'로 부르도록 했다.
 라이마루스, '에수와 그의 제자들의 목적에 관해'란
 책에서 그들이 그토록 기다린 구름을 타고 내려온
 구세주의 찬란한 재림 예언이 성취되지 않아
 적잖이 당황한 바울과 베드로의 상황을 다룬다.
 기독교의 종교적,도덕적 내용이
 알렉산드리아, 인도, 불교에 정통한 유대인에 의해
 짜 맞추어진 다음, 원래의 지상 메시아를
 천국의 메시아로 변형시켜 비극적 운명의 
 정치적 주인공을 운명의 연결점으로 만든 것이다.
 6세기 초 웨일스 지방에 살았던 아서라는 족장이
 작센족과 열심히 싸웠으나 잊혔는데
 어떻게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노래, 설화, 시, 소설에서 
 칭송받는 인물이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토마스 드 라 빌레마르케의 
 '원탁의 기사의 기원에 관한 에세이와 고대 브리튼의 민담',
 리트슨의 '고대 역사와 믿을 많나 자료에 의한 아서 왕의 생애'
 에서 아서 왕은 먼 과거의 불분명하고 흐릿한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실체가 없는 인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아무 근거도 없지만 수천권의 책에서 거듭 인용되는
 누턴의 사과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쇼펜하우어는 종교지도자로서 정치적 희생양이었던
  예수가 온 인류의 구원자이자 심판자로서 격상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예시로서 아서 왕 이야기와 뉴턴의 사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 쉽게 낚일 수 있는게
  인간이다.
  요즘의 유튜브에서 말도 안되는 바보짓꺼리 내지,
  구역질나게 X먹는 영상도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괄호는 내가 보충한 부분
 
참고로, 도올 선생께서 아래 영상 중반부부터
바울이 어떻게 기독교를 교리화하였는지를 다룬다.
물론, 이 분의 말도 100% 옳은 것은 아니겠으나
크리스찬이 아니라면
적어도 성경보다는 합리적으로 들릴 것이다.
 
기독교가 100% 사악하므로
멸절시켜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허구적 본질을 깨달아
뭣모르고 낚여서 한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것이 좋다.
물론,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평생 구걸한 싯타르타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성자를 자처한
성프랜시스와 같이 사는게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도 될 것이다.
다만, 종교를 정치적으로 악용하거나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거나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떠들어대는
민폐를 끼치지만 않았으면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vIJJLHAUZYw

 
https://www.youtube.com/watch?v=MtqPs4pu3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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