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홍학의 자리[스포주의]

dirigent21 2024. 3. 23. 15:14

난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가입하게 된 
온라인 독서모임에서
내가 추천한 강신주 장자수업과 이 책이 경합한 끝에
이 책이 선정되었다.

별다른 기대감을 갖지 않고 읽어갔는데
생각보다 무척 재미있었다.
정해연 작가의 후기를 보면
작가의 중요한 의도는 '재미'라고 되어 있고
그 취지가 충분히 이해된다.
글 자체가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문체로 되어 있고
영화 시나리오와 같이 묘사가 섬세해서
글을 읽는데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 소설은 사회의 갖가지 어두운 면을 
잘 버무려 놓은 것이라
읽는 과정 속엔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까
상상하는 가운데 재미를 즐길 수는 있을지언정
다 읽고 나면 뭔가 모를 씁쓸한 기운이 남는다.

이 책에서는 생각지도 않는 동성애 문제를 다루는데
난 동성애를 매우 불결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기독교에선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할 정도로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크리스찬 시절이었던 시절엔 죄악시했으나
지금은 무교라서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나 스스로는 동성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생각도 없다.
동성애자를 비롯 풍자 등 성소수자들이 출연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TV에 나오면 
돌려버릴 정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러함에도 그들에게 악플을 달거나
하는 미움의 감정은 없고 
나름의 고충이 있을 것이란건 이해하나
단지, 내가 보기 싫어하는 정도의 수준이다.

준후는 언뜻 보기에 평범하고 모범적인 사람이나
사실은 권태에 찌든 불행한 사람이다.
쇼펜하우어의 얘기라는 내용으로 어디선가
들은 것 중에 기억 남는 것이 있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의 연속이니
행복을 위해선 이 둘을 멀리하는 법을 
스스로 찾아야한다는 것.
불행을 느끼거나 여유가 없는 와중엔 
고통을 느낄지언정 권태를 느끼지 못하나
살만하고 여유가 생기면 권태가 유령처럼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은근히 다가온다는 것.
나 역시 인생을 살아오는 가운데
숨가쁘게 뭔가를 이루어 가는 동안엔 
괴롭울지언정 권태를 느낄 새가 없었으나
여유로워진 지금에 와선
권태의 기운에 휩싸일 때가 많으니
몸소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준후는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병들어가는 
전형적인 지식인의 모습일 수 있는 것이다.
준후는 영주라는 
현모양처(요새 보기 힘든)를 두고 있고
그를 사랑해주고 다가옴에도 
감사하거나 소중해 할 줄 모르고
권태라는 핑계로 그녀를 밀쳐낸다.

또한, 속으로 병들어가는 현대인은
이기주의자 내지 뜻하지 않은 범죄자가 될 수 있는데
이런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누구나 겪을만한 
일반적인 사건이 아니긴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어느 누군가에겐 
매우 잔인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우울한 자화상을 잘 표현한다.

이 세상의 온갖 저주를 다 받아
어느 한 곳 기댈 곳이 없는 불쌍한 다현은
이기적인 준후에 의지하면서 
또 다른 비극의 서막이 열린다.
자신의 부모와는 달리 착한 아이였기에
부모의 용서를 친구에게 구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일종의 탈출구로서 준후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장자 내편 '대종사'를 읽다보면 자여란 인물이 나온다.
이 인물은 몸이 뒤틀리는 일종의 희귀병을 앓아
병세가 나날이 악화됨에도
자신의 모습을 희화화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순응하는 모습이 나온다.
나는 이 정도로 비참한 상황은 겪어 보지 않아
그런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감히 얘기하진 못하겠다.
그렇지만 세상의 온갖 저주가 자신에게 몰려오거나
누군가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더라도
좀 뻔뻔해지고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아야겠다는
집착을 완전히 버려야 하지 않을까?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방법을 
가능한 잘 터득한다면
적어도 자신의 기대가 무너질 때
자신을 완전히 부숴버리진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다현은 죽음을 최후의 탈출구로 삼은 것이다.
장자 제물론편 '여희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의 착각이 아니라는 걸 어찌 알겠는가?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마치 젊어서 고향을 잃고도 
되돌아갈 줄 모르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진나라 왕이 여희라는 여자를 고향으로부터
끌고갈때 여희는 슬픔으로 눈물을 적시다 
막상 궁궐에 도착하여 맛있는 음식을 먹자
자신의 눈물을 후회했다는 이야기.
고통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세 가지다.
죽을 힘을 다해 극복하여 없애버리거나,
고통을 즐기거나 참으며 버티거나,
아니면 피하는 것이다.
다현은 일종의 세 번째 방법을 택한 것이다.
물론, 소소한 복수를 포함해서.

이 세계에 남아 있는 준후와
고통의 세계를 벗어나길 선택한 다현
누가 더 괴로을 것인가?
물론, 괴로움을 피하려면 다 죽으란 얘긴 아니다.
그런데, 오죽하면 죽음을 택할까란
생각도 한 번쯤 해봄직 하지 않을까?
OECD 국가 가운데 세계 1위,
전세계 4위의 자살공화국 한국의 씁쓸한 자화상이
이 소설속에도 담겼단 측면에서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