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강신주 장자수업 [42강. 삼인행 이야기 : 섭섭한 세계와 장자의 고독]

dirigent21 2024. 3. 13. 12:45

 

사랑이 결여된 경쟁 사회에 대한 이야기.

논어, "삼인행(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안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러나 장자는 "잘도 그러겠다~."

부국강병, 무한경쟁사회로서

사랑이 부족했던 전국시대.

현대적으로 보이나

전국시대보다 못할 수 있는 우리 시대.

-천지

효자는 부모에게 아첨하지 않고

충신은 군주에게 아부하지 않으니

이것이 제대로 된 신하와 자식이다.

부모의 말은 무엇이든 긍정하고

부모의 행동은 무엇이든 좋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못난 아들이라 한다.

군주의 말은 무엇이든 긍정하고

군주의 행동은 무엇이든 좋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못난 신하라고 한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됨을 모르는 것일까?

세상 사람들이 긍정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긍정하고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무엇이든 좋다고 하는 자신을

정작 아부꾼이나 아첨꾼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정말로

부모보다 더 권위 있고

군주보다 더 위엄 있다는 것인가!

자신을 아부꾼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불끈 화를 내고

자신을 아첨꾼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왈칵 화를 내지만

그들은 평생 아부꾼이자 아첨꾼일 뿐이다.

적절한 비유를 모으고

세련된 문장을 구사해서

대중을 끌어모으지만,

시작과 끝, 근본과 지엽은

서로 모순될 뿐이다.

근사한 옷을 입고

화려한 장신구도 착용하고

표정과 몸짓을 바꾸어가며

동시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자신이 아부한다거나

아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저 세상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옳고 그름을 따르지만

자신이 대중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않으니 최고의 어리석음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 사람은

크게 어리석지는 않고,

자신이 미혹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크게 미혹된 것은 아니다.

크게 미혹된 사람은

죽어도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크게 어리석은 사람은

죽어도 깨닫지 못한다.

세 사람이 길을 갈 때

한 사람이 미혹되어도

목적지에는 이를 수 있는 것은

미혹된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미혹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미혹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온 세상이 미혹되었기 때문에

내가 설령 아무리 방향을 알려준다고 해도

어쩔 수 없으니, 너무나도 슬픈 일 아닌가!


당대 지식인이었던

장자의 감정이 드러난 이야기.

도처에 편재하는 상명하복의 질서.

모든 재산과 권력을 가진

지배자에게 잘 보여야 하는 사회.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독일의 3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

인간의 본질은 인정 투쟁이다?

No!, 자유/사랑의 관계가 가능한 사람에겐 없는

인정 욕구.

자크 라캉,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지배/복종이 관철되는 사회의 패턴.

인문주의자의 꿈 : 내 욕망을 욕망해야 한다.

인정받는다 == 약자의 위치에 있다.

사회에 의해 점수나 고과가 매겨지고

채용되는 우리.

타자가 원하는 걸 하는 이유는 먹고살기 위해.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부모가 그른 행동을 할 때 말려야.

부모가 가진 것이 없을 때

부모에 대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음.

인정에 목마른 사회에 사는 세 가지 유형의 인물,

1) 모두에게 좋은 사람 :

인정받고자 자신의 욕망을 억압

남이 원하는대로만 하다보면 억누른 것이

약자나 가족에게 폭발할 위험 있음.

완전히 복종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지배하려는 경향.

2) 좋은 이미지 반, 나쁜 이미지 반인 사람 :

건전한 사람

3) 모두에게 나쁜 사람 :

진짜 나쁜 사람.

자유인의 전통 : 약자를 지배하지 않고

강자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

아닐 때는 아니라고 말해야 진짜 충신.

모두 인정받으려 하지만

인정 못받는 사람이 더 많은 사회.

외부의 평가가 아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하게 되면 무의미해지는 SNS.

자유롭고 당당하게 내가 결정하면 끝나는 것.

귀족만 전쟁에 참여했던 춘추시대(청동기).

철기 시대로 들어가며 총력전을 펼쳤던 전국시대.

과거 귀족의 품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유학.

소인, 노동자, 기술자를 지지하는

담론을 펼쳤던 묵가.

온갖 지식인들이 과연 우리 사회를

사랑과 자유의 공동체로 만들고자 할까?

No!, 지배와 복종 관계를 유지하려 할 뿐!

세상 사람들이 긍정하는 것을 긍정하는 이유 :

세상 사람들의 인정이 필요해서.

대중의 지지를 받을수록 높아지는 입지.

포퓰리즘(Populism,

대중을 중시하는 정치사상 및 활동) :

좋아요 많이 받는 방법,

당장은 이득이 있을지모르나

장기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도.

후세가 아닌 지금 우리의 이익을 위해 정해지는 법.

자신의 이익을 보장해 주는 사람을 지지하는 우리.

나는 민주주의자라서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해.

교육받지 않는 어른들이 결정하는 교육입법.

이익에 호소하는 사회.

민주주의/인문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포퓰리즘.

장자의 고민, 인정을 갈망하는 사회.

대중은 위대하다?, 민중은 진리다? :

No!, 이기주의/인정 욕구에 빠진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이 없는 사회를 꿈꾸는 대신,

자신이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면?

대중의 합의로 진정한 진리를 보장할 수 있을까?

사랑과 자유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No!,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신 내지 자신 주변의 이익.

아이들조차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사회,

우리의 서글픈 풍경.

지식인에게 필요한 성찰,

'네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인정받으려 떠드는 것 아닌가?'

팡세에서 인간의 허영에 대해 이야기한 파스칼.

모두 저쪽으로 가도 이쪽이 옳다고 생각하면

이쪽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하는 지식인.

옳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도

인정욕에 사로잡혀 있는가

끊임없이 반성해야.

장자의 성찰 : '나도 평범한(인정받으려는) 사람이 아닐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야

진정 사랑할 수 있다.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들 :

힘 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 노력.

인정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사랑이 있을 때 직언이 가능한 것.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선 상대방과 대등해야!

장자의 물음, "너는 전국시대에 살고 있는

네 주변의 인간들을 사랑하니?

아니면 그들에게 사랑받으려고 하니?

네가 사랑한다면 잘못 가고 있다고

이야기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왕에 의해 죽을 수 있는 충신,

부모로부터 내쳐질 수 있는 효자.

대중을 지적하면 대중에게 버려질 수 있음.

오늘날 지식인들은 어떤 모습인가?

자유를 꿈꿨던 장자의

지식인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이야기.

인정받으려고만 하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함.

사랑받으려하지 말고 사랑하고,

인정받으려하지 말고 인정하면

자유로운 길이 열림.

공자는 어떤 면에서 최초의 포퓰리스트.

사제관계로 묶여 다수가 되는 그 사람과 나.

반면, 장자는 셋 다 상태가 안 좋으면 어떡하려고?

장자의 입장, "유가 네가 귀족 계층을 지지하든,

법가가 부국강병을 꿈꾸며 신흥 군주를 지지하든,

묵가가 노동하는 민중을 지지하든 간에

다들 포퓰리즘 아니었냐?

장자의 고민 :

"온 천하가 안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대붕처럼 그냥 훨훨 날아갈까?

내 얘기에 불쾌해할 사람들에게 뭘 이야기하지?

그저 사랑하며 자유롭게 살라고

얘기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장자 시절 전체 땅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던 영토 국가.

장자는 대중을 위해 많은 이야기를 만드는 편을 선택,

그냥 떠나버리기엔 세상이 눈에 밟혀 섭섭했을수도.

우리 주위의 세 사람이 모두 옳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 명심. 


 

세 사람 가운데 반드시 스승이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네거티브한 스승,

즉, 저 사람처럼만 안살면 된다라고 느끼는 것도

배우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뭔가 배울만한 점을 찾거나

설령 못찾더라도 그렇데 되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배우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은 의미다.

그러나, 위와 같은 유연한 해석을 하지 않고

누구든지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때론 위험할 수 있다.

분명 자신은 옳은데 자신 주변이

모두 빌런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스승으로 삼게 되면

자신도 빌런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경계해야 할 일이댜.

요즘은 꼰대주의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꼰대에 대한 일종의 혐오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물론, 주제 넘게 나서서

누군가를 가르치려 하거나

자신의 잘못된 사고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MZ 입장에서 강요하지 않고

단순히 자신과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꼰대취급한다면

이는 새로운 행태의

비이성적인 왕따문화가 아닐까?

그들만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구시대적 혐오문화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느 컨텐츠에서

꼰대취급 받지 않기 위한 방법을 본 적 있는데

MZ가 물어볼 때까진 그들이 뭘 잘못하더라도

절대 가르쳐주지 말라는 얘기가 있었다.

참고로, 난 MZ가 뭘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모른채하고 그냥 방치하는 스타일이다.

근데, 이게 과연 바람직한 방향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예전에 내가 배우는 입장에 있었을 때

내가 물어보기 전에

내가 뭔가 어려워하는 걸 눈치채고

재치있게 가르쳐주는 선배가 있을 때

훌륭한 스승으로 생각될 정도로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모임에서든

정치,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대체로 금지하고 있다.

언젠가 자사 이스라엘 연구소에 출장가서

이스라엘 현지 사내 식당에서

그들과 점심 식사를 하는데

마치 시장통에 온 것 같이 매우 소란스러웠다.

저들이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열심히,

재밌게 하냐라고 물어보니

선거를 앞두고 있어 정치 이야기를 하고 있댄다.

그래서, 여기선 정치 이야기를

저렇게 대놓고 하는 분위기냐 물어보니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신기해하면서

여기선 정치 이야기를

맘껏 할 수 있는 분위기라고 했다.

한국은 어떠냐라고 물어보길래

싸움이 날까봐 대체로 이야기 못한다고 하니

납득 못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어떠한가?

사내 에티켓에는 정치 이야기는

지양하라고 되어 있을 정도로

정치 이야기는 금기 사항이 되어 있다.

정치 이야기는 대체로 무조건 싸움으로

번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건전한 정치가 뿌리내릴 수 있겠는가?

투표하는 행태를 보면 대체로

전 정권 혹은 현 정권에 대한 심판론에

사로잡힌 비이성적인 사고,

철저히 자신의 이해 관계를 따지는 방향

예를 들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느 지역에 지하철이 들어오게 한다거나

어느 지역을 서울로 만들어주겠다는 후보를 지지한다.

폭군에 맞서 직언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장자는 어떻게 보면

비겁한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뒤로 숨어서 이런 글만 몰래 써대고

밥벌어먹지도 못해 때론

빌어먹기까지 한 사람이니 말이다.

그러나, 멋있게 보일지언정 그렇게 직언하다

장렬히 사라져간 훌륭한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그들이 좀더 몸을 사려 그들의 목숨을 보전하며

훌륭한 유전자를 후손에게 전수했으면

어쩌면 조금은 나은 세상이 되었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주변의 정치인들을 보라.

훌륭한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죄다 사라져버리고

쭉정이들만 남아 있어 보인다.

이러한 면에서 장자는 참으로 현명한 길을 갔던 것이다.

그러기에 수천년이 지난 후대의 나에게 까지

이런 소중한 가르침이 전수되어 울림을 주는 것이다.

강신주 선생의 장자 강의를 듣기 전엔

최진석 선생의 장자 강의를 열심히 들었었고

이 분의 노자인문학이란 책도 정독했었다.

그런데, 이분이 뭔가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이는 것 같다.

수일 전에 아래 영상을 본 적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AiiiskZsQQ

 

우리 정치는 중세 시대로 역행했고

지금의 다수 양당으론 결코 안된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다만, 제 3의 세력을 육성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적폐청산인데

적폐청산은 이미 물건너갔다.

이승만이 집권하면서

친일세력을 제대로 숙청하지 못해

적폐세력이 너무도 견고하게 곰팡이 내지 바퀴처럼

이 나라에 깊숙이 뿌리내렸으므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 암울한 것은 두 번의 천금같은 기회를

운동권 세력의 뻘짓으로 날려먹고 덕분에

청년층이 보수화되어 정치시계는

과거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적폐세력이든 민주세력이든

장차 이 나라를 골로 가게 만들

공범이 되었다는게 가장 큰 문제다.

이공학은 내가 보기엔 필요악이다.

이걸 하지 않으면 외세에 의해 잡아 먹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열심히 해야 하는 분야다.

이공학을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면

대자연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가겠지만

대체로 대자연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반도체 기술은 우리 나라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기술 중 하나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구선이 부활하듯

이건희 회장이 부활하는 이변이 없다면

과거의 기술 패권을 잃게 될 것이다.

이미 숨은 실력자들은 하이닉스 내지 마이크론,

심지어 인텔로까지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두 최소한의 엔지니어의

최소한의 품격을 무시한 회사 내지

정부의 뻘짓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처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런 인간들이 정책을 수립하는 한

패권 경쟁에서의 도태는 결코 막을 수 없는 대세다.

과거 일본이 반도체 주권을 우리에게 빼앗긴 것처럼

결국, 우리도 미국이든 중국이든 이대로 간다면

기술 주권을 빼앗기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삼성전자의 주가는 반토막,

아니 그 이상으로 떡락할 것이고

여기저기서 곡성이 울려퍼질 것이다.

삼성전자가 망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위대해보이던 노키아도 망했는데

삼성전자라고 망하지말란 법이 있겠는가?

뒤늦게라도 정신차려서 엔지니어를 대우해주고

좀더 훌륭한 전문 경영인 내지

훌륭한 리더를 영입한다면

어찌어찌해서 유지는 하겠지만

적어도 과거의 성장성 내지

천문학적 이익은 결코 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처럼 된다면?

그건 우리 국민들이 선택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태연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소수의 능력이 되는 사람은 이 나라를 떠나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남겠지만

그게 안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후진국화된 나라에서 가난과 폭력에 시달리며

목숨을 부지하는 수 밖에.

다만, 가난해지더라도

과거의 공동체 정신이 부활한다면

어쩌면 더 살맛나는 세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강의를 듣다보니 대학 동기 가운데

재수를 해서 나보다 한 살 많은

성준이란 친구의 말이 갑자기 생각난다.

그 친구가 말하길,

"요즘 애들은 너무 일본화되어 있어 솔직하지 못해"

그 친구는 넉살좋은 웃음을 머금은

뽀식이 같은 이미지였지만

생각보다 꽤 민감한 친구였다.

그럼에도 같이 있으면 편한 그런 친구였다.

어쩌면 장자 선생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요즘은 연락이 끊겼고 경남 사천 어디선가

회사를 다닌다는 소식만 들었는데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어떻게 변했을지는 모르겠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도

자유롭게 못하는 더욱 각박한 세상이 된 거 아닌가 생각한다.

 

[2025.2.21]

조선 시대라면 능지처참과

멸문지화를 당했을 내란수괴를 두고

좌우 이념 문제와 구분하지 못한채

오직 본인의 정치적 이익에만 사로잡혀

범죄자를 옹호하며 분탕질을 해대는

토착왜구 내지 극우세력들이 총출동하여

대환장의 콜라보 파티는 계속되고 있다.

나라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