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강신주 장자수업 [37강. 도추이야기 : 문턱에서 길을 보며]

dirigent21 2024. 3. 13. 12:22

'길' + '지도리(경첩)'.

추상적인 것보다 구체적인 것에서 영감을 찾는 인간.

문 안과 밖 경계선에 서 있는 느낌.

세 가지 상태 : '문', '벽', 아무것도 없는 것.

'문' : 연결될 수도 막을 수도 있는 문.

'벽' : 단절의 이미지.

-제물론

사물 중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사물 중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스스로를 저것이라 여기면

(이것은)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를 이것이라 여기면

(저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으로부터 나오고,

이것 또한 저것에 따른다고 말한다.

저것과 이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견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동시에 생기는 것은 동시에 죽는 것이고

동시에 죽는 것은 동시에 생긴 것이며,

동시에 허용되는 것은

동시에 허용되지 않는 것이고

동시에 허용되지 않는 것은

동시에 허용되는 것이다.

옳음을 따르는 것이

그름을 따르는 것이고

그름을 따르는 것이

옳음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저것과 이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견해를)

따르지 않고

사물을 '자연스러움(천)'에서 비추어 보는데,

이 또한 인시다.

이것은 또한 저것이고,

저것은 또한 이것이다.

저것 또한 하나의 시비고,

이것 또한 하나의 시비다.

그렇다면 저것과 이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저것과 이것이

자기 짝을 얻지 않는 경우를

'길의 지도리'라 한다.

지도리는 처음부터

그 '원의 중앙'을 얻어야 무한한 것에 대응한다.

그렇게 되면 옳음도 하나의 무한이 되고,

그름도 하나의 무한이 된다.


제자백가 : 여러 선생과 백 가지 학파.

천하 편의 혜시의 역물십사 :

사물을 경험한 후 얻은 열 가지 방법.

물방생방사 : 사물이 태어났을 때가 죽어가는 때,

정오의 태양도 지는 순간,

서양에서는 자크 데리다(프랑스 철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스위스 언어학자) 등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논의된 철학 주제.

시조는 첫 번째가 아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가 있어야

첫 번째가 의미 있음.

데리다의 주장 : 기원이란 최초가 아니다!

뒤에 무언가 쌓인 후에야 생기는 기원.

첫 번째가 의미 있으려면 두 번째가 있어야,

아이가 하나일 때 첫째란 말 안씀.

살아 있다는 것은 죽지 않았다는 것,

죽었다는 것은 살아 있지 않다는 것.

혜시의 입장을 따르던 장자가

혜시와의 이별을 선언하는 구절.

벽 == 혜시의 입장, 문 == 장자의 입장.

사물 중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사물 중 이것 아닌 것이 없다

== 같은 사물이라도 내가 가지고 있으면 이것,

타자가 가지고 있으면 저것

시(이것), 피(저것) :

나와 타자 사이에 경계가 처져 있기 때문.

혜시의 생각 : 경계를 넘지 않아야 한다,

피지방생지설(동시에 생겼다 == 동시에 죽었다).

벽 없이 타자와 소통하는 것 :

벽을 지나 저쪽으로 가는 것,

그렇게 되면 이것은 또한 저것이고,

저것은 또한 이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같아지는 느낌.

집 안에 있다가

내가 바깥으로 나가면 바깥이 되는 집.

혜시의 생각 : 내 앞에 있는 것이 이것이고

이것이 생겼으니 저것도 생기는 것.

장자의 질문 : '책은 이것이다'라는게 맞을까?

그건 내입장에서만 맞고 저 사람에겐 저것 아닐까?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이 이것이 될 때의

유동성(이것/저것이 확정되지 않는 것), 벽이 아닌 문.

나에게 이것이었던 것이

저것이 되려면 저 사람에게 가야!

혜시처럼 이것/저것 구분해서 생각하는 우리.

타자의 자리에서도 판단할 수 있는 시비.

태어날 때부터 있고 있어야 하는 벽,

그러나 문이 없으면 타자와 관계를 못 맺고 고립.

'문' : 나의 독립성을 강조하면서도

타자와의 소통 통로.

문, 벽 아무것도 없으면 죽게 되는 우리.

혜시 : '네 자리를 지키고 나가지 마라,

아무리 노력해도 타자의 입장에 못 서',

논쟁에 휘말리지 마! 네 입장에서 평가해!

네 입장에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야!

장자의 입장 : 완벽히는 아니지만

근사치로 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 '저것'의 차원에서는

타자 옆에만 가도 충분하지 않을까?

타자가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것의 미묘한 차이는 알지만

'어차피 다르니 가지말라'는

혜시의 입장에 머물지 않는 장자.

누군가를 이해 못해도

누군가 옆에 설 수는 있으니,

벽을 치고 노력도 안 하는 것보다 낫다!

장자와 혜시간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제물론.

타자 옆에 가면 (이것과 저것간의 대립의)짝이 없는 것.

자신을 지키려고 문 안에 있는 것을 인정하는 장자.

내 마음에는 문이 있을까?

'나감'의 힘 : 한 번이라도

타인의 입장에서 나를 본 적 있는가.

장자의 질문 : "너희들의 마음은 벽이냐?

아니면, 문이냐?".

'문'일 때의 숙제 : 닫아야 할 때 제대로 닫기.

문은 있는데 문을 열고

제대로 나가본 적은 없는지도 모름.

내가 가진 것을 저것이라고 본 적 있는가?

스스로에게 손가락질해 본 적 있는가?

혜시는 안전하나 외롭고

장자는 외롭지는 않지만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타자와 소통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문.

남이 보는 것, 느끼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더라도

근사치까지는 갈 수 있다.

날개이야기에서 집을 비워야

빛이 들어오듯 문을 열어야

타자도 들어옴.

타자가 들어온 이후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 풀어가야할 숙제.

문을 닫는 것부터 출발하여 열어봐라.

문을 닫은 후 외로워지거나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나가고 싶을 때

열고 나가자.


원문만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로

꽤 난해한 이야기인데

강의를 들으니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문을 가지고 있을 때의 가장 큰 문제는

고립의 에너지가 강력할수록 문을 열었을 때

문을 못 닫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비행기가 높은 상공에 있을 때 기압차로 인해

문을 일단 열고 나면 닫을 수 없고

모든 것이 빨려 나가니까.

차라리, 문이 없거나 얀여느니만 못하여

내가 가진 모돈 것이 남에게 빨려나가는 꼴이니까.

말년에 외로운 나머지

함부로 마음 문을 열었다가

사기꾼 내지 사이비 종교단체에게까지 여는 바람에

전 재산을 날리거나

치명적인 마상을 입게 되는 것처럼.

따라서, 함부로 문을 달 생각도 하지 말고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

문을 달지 말지 결정하고

문을 열어야하는 상황인지 아닌지

정확히 판단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