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말 [2]
타인의 평가는 우리의 행복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으니
타인의 생각에 휘둘리지 마라.
자긍심은 스스로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나
허영심은 외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려는 노력이다.
허영심은 꾸미는 말을, 자긍심은 조용함을 낳는다.
따라서, 타인의 좋은 평가를 원한다면 차라리 침묵하라.
인생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지
타인의 평판으로 사는 것이 아니란
단순한 진실을 깨달으면 좀더 행복해질 것이다.
타인의 의견을 최대한 민감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휘둘리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타인의 말에 기뻐하거나 불쾌해하는 것 모두
사실은 같은 실에 매달려 조종당하며 평가의 노예가 되는 것.
내가 남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의 가치를 냉정하게 평가하는게 행복의 지름길.
명예란
객관적으로는 우리의 가치에 대한 타인의 평가이며
주관적으로는 타인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
어리석은 자일수록 겸손과 거리가 멀고 불쾌해하는데
겸손의 미덕을 따를수록 타인과 다를바 없는
평범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므로.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
"지혜로운 자조차 가장 포기하기 힘든 것이 명예욕",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어리석음을 제대로 직면해야.
인간의 생각은 대부분 틀리거나 왜곡되어 있고 불합리,
그런 까닭에 잘못된 생각에는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없다.
타인의 견해는 대부분 호의적이지 않으므로
타인의 말을 들어 기분이 상하지만
명예도 사실은 간적접 가치만 있을뿐 직접적 가치는 없다.
만약, 타인의 의견에 휘둘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난다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마음의 안정을 얻어 '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인기 높은 자긍심은 애국심,
자신만의 장점이 있다면 다른 수많은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애국심 같은 것에 탐닉하지 않을 것.
인생을 지나가는 많은 것이
원래는 모두 존재하지 않았다는 진실을 곧 알게 될 것.
쇼펜하우어는 헤겔 등에 밀려 인정받지 못하다가
환갑이 넘어 출간한 수필집,
"소품과 부록"(한국어판은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이
독일, 영국에서 호평을 받으며 유명해짐.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파르지팔
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음악적으로 표현.
니체, 키르케고르, 톨스토이, 토마스 만(Thomas Mann)에 영향.
토마스 만, 1918년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
가벼운 물체는 외부의 힘을 받아들일만한 중심이 없기에
아무리 세게 던져도 힘없이 떨어지듯이
가볍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나
천재의 걸작을 접한다 해도 본질적으로 영향을 받기 어렵다.
모든 훌륭한 것이 천천히 성숙하듯,
명성도 오래 지속되는 것일수록 늦게 온다.
사후까지 이어지는 큰 명성은
마치 씨앗에서부터 천천히 자라는 떡갈나무를 닮았다.
한편 덧없는 명성은 1년이면 금방 자라는 식물과 같고,
잘못된 명성은 쉽게 싹트고 뽑히고 마는 잡초와 같다.
누구나 자신과 동질적인 면만을 이해하고 평가하며
자신과 완전히 비슷한 것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한다.
평범한 자에게는 평범한 것,
저속한 자에게는 저속한 것,
산만한 자에게는 혼란한 것,
아둔한 자에게는 무의미한 것이 동질적이다.
선과 정의를 추구하고 악을 피하려는 자는
대중과 지도자에 저항해야 한다.
이와 같이 명성은 추구하는 자에게 뒤따르지 않고,
추구하지 않는 자들에게 찾아온다.
명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시대에 영합하고,
명성을 등한시하는 자는 이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남에게 받수받는게 중요한 사람일수록
사실 받수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 가깝다.
사후에 명성을 누릴 작품이
동시대인에게 인기 있는 것은 우연일 뿐이다.
평범한 사람은 판단력이 부족한 데다
고상하고 난해한 작품을 평가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위와 명성이 높은 사람들의 평가를 맹신한다.
그러니 동시대인의 칭찬은 진정한 사상가에게는
그다지 가치 없는 것이다.
자기 속에 지닌 본질만이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다.
우리가 소중히 해야할 것은 명성 그 자체가 아니라
명성을 얻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실체고, 명성은 단지 사물의 속성일 뿐이다.
일종의 반사광처럼 어떤 장점이든 명성에 의해서만
자신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거짓 명성의 소유자는 그저 명성만 얻을 뿐인데
업적이 없는 명성이나 명성을 동반하지 않는 업적이 있으므로
행복론의 측면에서 명성은
우리의 자긍심과 허영을 북돋아주는
더없이 진귀하고 맛 좋은 음식과 다름없다.
진정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명성이 아니라 명성을 얻게 한 업적 그 자체에 있다.
더 정확하게는 그 업적을 만들어낸 사고방식, 능력에 있다.
살아 있는 이를 위해 기념비가 세워진다면
이는 후대가 그를 아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사후에도 이어지는 명성이란 나이가 들어서야 얻울 수 있다.
행복의 본질은 명성을 안겨준 위대한 자질 자체와
자질을 발전시킬 기회를 발견했다는 데 있다.
정신의 풍요로움이 담긴 결과물은
다음 수 세기 동안 찬사를 받는다.
예전부터 있어왔던
대중스타들에 대한 맹목적인 팬덤,
나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은 임영웅에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몰리는데
그들 가운데 임영웅의 노래에서
어떤 차별적인 심미적 가치를 지니는지 제대로 알고
몰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련지 모르겠다.
그저, 우왕좌왕하며 남들에게 그저 잘보이려하거나
자랑질하려는 덕질의 일종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예전부터 그래왔듯
주관적 편향에 의해 눈과 귀가 꽃혔든가.
물론, 나로서는 임영웅 부류의 노래를 들으면
그냥 듣기에 시끄럽지 않다 정도로 끝나고
그렇게 큰 돈을 들이고
내 시간을 투자하여 일부러 콘서트장에 갈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만.
다만, 그가 버는 천문학적인 돈은 부러울뿐이다.
옛날에는 극소수의 스타들에게 몰렸다면
요즈음엔 소위 인플루언서란 그럴듯한 이름하에
수많은 듣보잡들에게도 팬덤 폭격이 일어난다.
이른바 떡갈나무가 아닌, 잡초의 시대인 것이다.
원래 떡갈나무보다 잡초가 훨씬 빨리 자란다.
예전엔 그나마 잡초가 자랄 토양이 좁았다면
지금은 소셜미디어에 의한 가상 공간에서
잡초가 자랄 토양이 무한대가 되었으니
잡초가 얼마나 무성해지겠는가.
수많은 대중스타, 인플루언서 가운데
진정한 명성을 얻을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중요한 시대가 아니다.
오직, 조회수를 올려서 돈을 많이 버는게
장땡인 시대가 되었으니
그러한 조류에 생각없이 휘둘리면
머리가 텅텅 빈 머저리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배가 터지도록 먹는 이른바 먹방.
남들이 꿀꿀대며 처먹는게 그렇게 재미가 있는지는
나같은 꼰대 입장에선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그들 입장에선 따분하고 신경질적인
진지충인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을 말리거나
그들을 직접적으로 평가할 자격은 물론 전혀 없다.
그러니, 그냥 나만의 사적인 자리에서
한심한 시대의 흐름에 대한 푸념을 늘어 놓는 것이다.
나같은 머저리가 어찌 시대의 흐름을 바꾸겠는가?
물론, 모든 인플루언서 내지 유명 대중스타가
잡초란 얘기는 아니다.
분명히 그 가운데에는 떡갈나무도 있을 것인데
그건 그 가치를 알만한 사람에겐 보일 것이고
시간이 한참 흘러야만 정확히 구분될 수도 있다.
나의 경험상 벼슬을 추구하지 않고
남들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면서
남에게 잘보이려는 노력을 안할수록
마음이 무척 편하다는 사실이다.
나와 정반대로 사는게 대중스타 내지 인플루언서이니
그들이 공짜 점심을 먹는 건 아니란 사실은 분명하다.
떼돈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본질적인 가치를 훨씬 상회하고
허영의 끝판왕인 명품 따위를 살 생각이 전혀 없고
가치가 과대 평가된 거대한 잡초밭엔
얼씬할 생각도 하지 않으며 남들에게 잘보일 생각 없이
그저 분수에 맞게 조용히 살아갈 것이다.
남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잡초는 과감히 제끼고
어지러운 잡초로 혼탁해진 공간에서
거대한 대자연과 같은 품격있는 컨텐츠를 고르고 골라
그들이 아낌없이 주는 무한한 카타르시스를
마음껏 공짜로 누릴 생각이다.
마치 대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 맑은 공기, 샘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