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무문관 : 주인공으로 살기 [8강]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해 쓰는 방법 : 당근과 채찍,
이 둘을 물리칠 수 있어야 주인이 됨.
남의 이야기를 잘 배우고
평가에 연연하여 진학하는 명문대,
이런 지식인이 지도자가 되면 답이 없음.
author(저자), authority(권위, 당국).
명령하는 자와 명령받는 자가
확연히 구분되면 억압사회.
서양의 암흑시기에서 굉장했던 텍스트의 권위,
아퀴나스,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
본문은 그대로 두고 주석의 형태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
논어,맹자,대학,중용 원문은 건드리지 말고 주석만 닮.
퇴계, 다산 모두 주석, 편지 등을 통해 자신의 생각 피력.
자신의 책 출판 : 최근 이삼백 년이 지나 생긴 분위기.
옛날 진짜 책을 쓸 수 있는 존재 == 신.
경율론 : 부처의 경전을 3가지로 나눈 것,
경(부처가 말한 교법), 율(불제자가 지켜야 할 규칙),
론(이론가의 교리 설명, 나가르주나의 중론).
불교는 일찌감치 저자로서 자기 글을 맘껏 씀.
니아야학파(Nyaya) : 힌두교의 정통 육파철학,
정리론, 정리학파.
나의 이야기가 힘이 없는 이유 :
온몸으로 겪지 않은 걸 함부로 이야기하므로,
진짜 사랑을 해본 사람은 남녀 타령을 함부로 하지 않음,
진짜 전쟁을 겪어본 사람은 전쟁 이야기를 잘 하지 않음,
언제 위로해야 할지 언제 말해야할지 다 앎,
경험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면서
어른이랍시고 떠드는게 꼰대.
경험하지 않은 것으면 침묵하고 배울 것.
비트겐슈타인 :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
남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안다고 하지 말라.
스마트폰을 통한 정보의 홍수속에 모두 다 앵무새.
스마트폰을 많이 봤다고 경험이 쌓이는게 아님.
Authority가 없는데 다 아는것처럼
Authority를 부리는 꼰대.
짧으면 읽기는 쉽지만 이해하긴 어려운 화두.
무문관 28칙 '구향용담'
덕산이 (금강경을 들고) 가르침을 청하러 왔을 때
마침 밤이 되자 용담 스님이 말했다.
"밤이 깊었으니 물러가는게 어떻겠는가?"
그래서 덕산은 인사를 하고 발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바깥이 너무 어두워 되돌아와서 말했다.
"바깥이 깜깜합니다."
그러자 용담 스님은 종이 등불에 불을 붙여 건네주었다.
덕산이 그것을 받으려 할 때
용담 스님은 등불을 불어 꺼버렸다.
바로 여기서 덕산은 갑자기 깨닫고
용담 스님에게 절을 했다.
그러자 용담 스님은 물었다.
"그대는 어떤 불법의 도리를 보았는가?"
덕산은, "오늘 이후로 천하의 노화상께서 하신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날 용담 스님은 법당에 올라 말했다.
"만일 이가 검이 세워진 수풀과도 같고
입이 피가 담긴 쟁반과도 같아서
방망이로 때려도 뒤도 돌아보지 않을 남자가 있다면
언젠가 홀로 우뚝 솟은 봉우리 정상에
나의 도를 세울 것이다."
마침내 덕산은 금강경의 주석서를 법당 앞에 들고 나와
횃불을 들고 나와 말했다.
"불교의 모든 심오한 변론들을 남김없이 밝힌다고 해도
허공에 터럭 하나를 날리는 것과 같고
세상의 모든 진리를 모조리 갈파한다고 해도
물 한 방울을 거대한 계곡에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이어 주석서를 바로 불태우고 용담 스님을 떠났다.
금강경 : 공한 지혜로써 그 근본을 삼고
일체법무아의 이치를 요지로 삼은 대표적은 불교 경전,
우리를 지킬 뿐만 아니라 잘못된 생각도 바꾼다.
금강경의 핵심 == 공.
공 : 자아, 실체, 영원한 것은 없다.
무아(제법무아) : 만물에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아트만)가 없다, 나의 것은 없다.
어렸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의 내용은 다르다,
비트겐슈타인 : 언어는 문법적 착각(grammatical illusion)에서 오고
그로 인해 고뇌한다,
비가 안온다(마치 비가 있었던 것 같은),
주어의 실체화로 생기는 실체에 대한 집착.
다르마(dharma) : 불교의 중요한 개념, 법.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의 것이 있다",
그런데 나의 것이라 생각하면 그것들이 사라짐,
사라지면 고통스러움,
그래서 불교엔 무아(==무상)가 있음.
내가 가지려하나 못하니 무상함, 영원하지 않음.
자아와 영혼을 의식하면 나의 변해가는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움.
열반경의 가르침 :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무상".
나와 나의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고통은 일어나지 않음.
"이게 내 것이라"하는 순간 무상이 더 많이 보임.
자가의 도색이 흐려지면 속상하지만
세입자는 전혀 그렇지 않음.
영원을 꿈꾸면 고통스러워짐.
삼법인(세 가지 진리) : 불교의 근본 교의,
하나의 풀패키지로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불교의 모든 가르침 화두를
제대로 통과하면 '자비'가 나와야,
내 것에 대한 생각이 많이 줄어들어야.
가장 어려운 것 : 타인의 마음에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
사랑은 물이 끓어오르듯 자발적으로 올라와야 하는 것.
사랑과 자비는 강요가 아니다.
금강경(부처)을 들고 다니던 덕산은
선종과 결이 맞지 않았음,
자신이 부처가 되려고 하지 못했으므로.
당시 남중국의 새로운 불교 흐름인 선종이 못마땅하고
금강경을 전부 외울 정도로 경전에 정통했던 덕산.
용담스님의 건넨 불은 용담스님 것.
덕산스님이 의지했던 두 가지 :
금강경, 용담스님이 준 등불.
덕산스님이 가지고 있던 것들은
본인이 아닌 금강경이 주인.
경전이 주인이니 그 불빛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금강경대로 논쟁하는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 아님.
세상은 다 어둡고 누군가 밝혀놓은 불대로 살아가는 것,
불을 들고 있는 사람에 휘둘리는 삶.
백척간두진일보, 아무 불도 없다는 걸 알고 걸어가면 됨.
덕산스님은 과연 자신의 불을 피웟는가?
금강경을 불태우고 변화한 덕산 :
"나의 길을 가겠다"
"나는 부처가 되겠다"
"내가 주인이 되겠다"
등불을 든 사람에 의지하면 그 사람이 원하는 장소에서 못 떠남.
특정한 앎의 노예가 돌 것인가,
어떤 지식에도 의존하지 않고
미지의 영역에 몸을 던질 것인가.
수많은 학문, 종교도 모자라
학문 가운데에도 학파가 있고
종교 가운데에도 각종 분파와 교단이 있다.
이 세상의 수만가지 철학은 어떠한가?
부자가 되는 길을 알려주겠다면셔
차고 넘쳐나는 재테크 전문가들은 어떠한가?
제각기 자신들이 잘나고 옳다고 밝혀 놓은 등불이다.
넘쳐나는 등불은 길을 안내해주기도 하지만
불나방을 꼬이듯 그 불에 잘못 달려들면 타죽거나
너무 강한 빛에 눈이 멀기도 한다.
또한, 이 화두에서의 불과 같이
불은 족쇄가 되어 불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이공계 교수 가운데에는 물론 훌륭하신 분도 있으나
때론 자기가 가진 학문적 기득권과
학위 수여권을 남용하며
수많은 젊은 이공학도를 휘두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세상이 만만치 않은 것은
누구나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싶지만
자신만의 등불로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하기에
자신의 불을 밝히는데 성공한
소수의 권위자 내지 금권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만의 불을 밝히지도 못하면서
가진게 자존심뿐이라 남의 불에 의지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길을 찾기 위한 개고생은 기본이고
길을 보지 못해 넘어져 죽거나
낭떠러지인줄 모르고 걷다 떨어져 죽어야 할 것이다.
작게는 가족을 괴롭히는 것으로부터
크게는 남의 것을 빼앗아 먹는 민폐족이 되거나.
따라서, 자신만의 불을 밝히기 위해선
일단은 불구경을 많이 해야 한다.
덕산스님도 깨우침을 얻은 계기가 무엇인가?
바로 용담스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불을 밝히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불을 가능한 많이 보는 것이 현명하다.
아직도 철학은 잘 모르지만
철학은 일종의 생각의 박람회와 같아 보인다.
이런 철학, 저런 철학을 알고 있다고
아는 체하거나 교양 있는 척하기 위함이 아니라
각종 진기한 생각의 체계를 안 다음,
자신에게 가장 맞는 길은 어떤 길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찾을 줄 알아야 철학을 공부한 보람이 있는 것이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생각을 갖지 못한다면?
공자의 사상을 들을 땐 이게 절대 진리인거 같고
장자의 사상을 들을 땐 또 이게 절대 진리인거 같은 등
남의 생각에만 휘둘리게 된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을 경험할수록
남의 생각에 휘둘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는 측면에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내 삶의 목표가 일반인으로서 그나마 꿈꿀 수 있는
주인공 앤디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물론, 쇼생크 감옥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자의로 탈출한 사람은 앤디였다.
극 중에서 석방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의 등불을 발견하지 못해 자살을 했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앤디를 믿었던 또 한 사람은
앤디와 감격적인 재회를 한다.
그 뒷 이야기는 물론 없지만
앤디와 감격적인 재회를 했더라도
과연 끝까지 같이 잘 살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등불이 아닌
앤디의 등불로 일단은 간 것이기에.
대부분의 일반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본의 아니게
죄인 내지 노예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란 감옥에서 조금이라도 일찍
탈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좋은 건 적어도 10억 ~ 100억의
금융자산을 확보해
최소한의 돈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아니면,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면서
진정한 자연인으로서 살 수도 있고.
그런데, 극소수의 경제적 자유를 누린 사람 가운데
진정으로 돈의 주인이 되는 사람 또한 얼마나 될까.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재테크 컨텐츠를 보면
소위, 경제적 자유를 누렸다면서
수십억의 순자산을 모았단 사람들조차
여전히 자신의 경험을 돈으로 바꾸기 위해
(물론, 겉으로는 보람, 희생 등 선의의 포장지를 발라놓았지만)
책을 내고 각종 강좌 내지 학원을 차리면서
세를 불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돈에 대한 욕심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실수록 갈급하기 때문에
경제적 자유를 누렸다고 해서
끝나는 게임은 결코 아닌 것이다.
이 세상에 어느 길이 옳다는 정답은 없으며
각자의 정답을 찾아야 할 뿐이다.
나 역시 아직까지 가급적이면 나그네와 같이
고민없는 상팔자의 길을 가겠단 것 이외엔
어느 길을 가야할지 정확히는 모른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고
자본주의의 필수재인 돈에 대한 탐욕은
필요악이기에 버리지 않는 것이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을
엄청나게 불릴 기술과 배짱은 타고나지 않았기에
쓸데없는 욕심은 절대 부리지 않고
가능한 새나가지 않게 틀어막고
연금 자산을 견고히 해나가는 가운데
미련해 보이지만 내가 가장 잘하는 방식대로
현금을 모으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흔히들 은행에 예금하는 게
은행의 호구가 되는 길이라며
이 돈을 어떻게든 투자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잘못 투자하다가 날리거나
물려서 비자발적 장투자가 되는 것보단
당분간은 은행의 호구가 되는 차선책을 취하는게 좋다.
내 삶의 최우선 순위는 고민없는 편안함이다.
돈이 불어났다고 해서
그 돈으로 일을 벌이거나 사업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과도한 집착으로 업을 쌓는 것은
고통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돈은 쓰는 것보다 모으는 게 훨씬 재미있기 때문에
모으는 것인데 지독히도 돈을 안쓰는 나를 보면
돈은 모으는 맛이 무척 좋아 그런 것인데도
아내가 딱히 여기기도 한다.
돈을 모으는 것은 나의 동산에 나무를 가득 심어
푸른 동산에 맑은 공기가 가득하게 하는 것과 같으며
돈을 쓰는 것은 나무를 마구 베어 내
민둥산으로 만들어 공기를 탁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인데 말이다.
어떤 철학과 종교든 최종 단계의 산물은
사랑과 자비이어야 하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는 예수와 석가모니 등 위대한 사람들의
공통분모이자 정말 단순한 진리임에도
가장 행하기 어려운 덕목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종교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지금의 종교는
대부분 모조품이란 사실을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어렵지만
진정한 사랑과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은
더 어려운 길이다.
부자가 전재산을 처분해
천국티켓을 얻었단 성경의 내용,
부자이면서 자신이 쓸 것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나눠준 사람
이게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높은 수준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과연 이 수준에 다다를 수 있을까?
아직 사랑과 자비라는 산에 오를 생각조차
못하는 한심한 수준이라고 보는데
사랑과 자비란게 아직 내게는 잘맞지 않는 옷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기 보다
이러한 옷을 입을만하게 되도록
내 체형을 다듬는게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굳이 억지로 그러할 생각은 없는 가운데
사랑과 자비의 동산을 오를만한
체력이 자연스레 길러져
언젠가 힘들이지 않고
기분좋게 등정할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은 든다.
개인의 행복 관점에선
사랑과 자비의 동산이 좋은 건 알아서
굳이 너무 힘들게 올라가는 것보단
차라리 오르지 않는 편이 낫다고 본다.
사랑과 자비의 동산에 억지로 오르는 것 역시
쓸데없는 집착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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